길은 삶이다.
길은 스승이다.
길 위에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길은 묻는다. " 그대 어디로 가는가? "
유네스코에서 인증한 세계의 대표적인 순례길이 둘 있다. 하나는, 프랑스 생장을 출발하여 피렌체 산맥을 넘어 스페인 콤보스텔라 대성당까지 이르는 약 880Km에 걸친 '산티아고 순례길'. 365일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길이다. 대성당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전율한다. 전율은 감동이 되고, 감동은 성숙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는, 일본 간사이 지방의 와카야마,나라, 미에현에 이르는 기이(紀伊)반도에 위치한 쿠마노고도((熊野古道))다. 2004년, 길의 가치를 인증받아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개창, 1,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밀교, 진언종의 총본산으로 신성시 되는 고야산(高野山)을 중심으로 7곳으로 다양하게 이어진 약 600Km에 걸친 수행길이다.
수년전, 아름드리 쭉쭉 뻗은 원시림속에 짙은 이끼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고야산 오쿠노인(奥之院) 속을 걸으며 언젠가 "이 길을 꼭 끝까지 걸어보고 싶다"고 꼬깃 다짐했던 기억이 새록하다. 미지의 길은 늘 설렌다.
애시당초 두바퀴 자전거를 타는 길이 아니다. 두발짝으로 사푼히 걸으며, 곱씹어보고, 사색하고, 자책도 하고, 또 그러다 눈물도 짓는다. 그리곤, 또 배시시 번져나오는 미소를 머금는 길이다. 1815년, 을해박해를 피해 더 깊은 산속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숨어 모여 들었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가지는 못하였다. 약40명에 이르는 믿음자들은 단박에 죽음이 되어 불태워졌다.

600m 산자락위에 돌무덤이 되었다. 그 마을은 성지가 되었다. 자신의 믿음과 목숨을 바꾼 돈독함은 오늘날 "한티성지"로 거듭났다. '자신을 돌아보고, 비우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45.6Km에 이르는 길이다. "한국의 산티아고 길"의 탄생이다. 줄잡아 1박 2일은 걸으며, 20곳의 인증 포인트를 꼭꼭 찍어야 제대로 된 순례자로 대접받는다. 이번에는, 그 길을 두바퀴 자전거로 낑낑대며 달려보는 도전을 하는 것이다. 신부님이 아시면 노발대발 하겠지만 도리없다. 끓어오르는 의욕이 먼저다.
◆가실에서 한티까지, 한티가는 길, 자전거로 도전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나를 찾아가는 순례 자전거 길 45.6Km. 결코, 호락호락 하지가 않다. 아마도, 경상북도 명품 자전거길 25선 중 가장 힘든 코스중 하나일 듯 싶다. 끌고, 밀고, 타고 서너개의 재를 넘어 한티성지 해발 650m 까지 올라가야 한다. 길은 왜관의 가실성당에서 시작한다. 100년을 훌쩍 넘은 성당이다. 충남 아산의 공세리 성당과 더불어 한국의 아름다운 성당으로 손꼽힌다. 사진작가들의 최애 포인트 중 한곳이다.
성당 앞 계단에 걸터 앉으면 언제, 누가, 누구랑 찍어도 인생샷이 연출된다. 성당 옆 동굴속 성모와 예수상을 바라다보면 금새 마음이 차분해진다. 불교 신자라도 뭐 괜챦다. 성당 앞, 스탬프로 꽝 힘차게 출발 인증을 찍고 뒷쪽 작은문을 통해 자전거는 출발한다. 길은 다섯개의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돌아보는 길 10.5Km', '비우는 길 9.5Km', '뉘우치는 길 9Km' ,'용서의 길 8.5Km', '사랑의 길 8.1Km', 도합 36곳의 포인트를 지나게 된다.

제1길 돌아보는 길, 제2길 비우는 길
길의 주제는 삶의 재구성이다. 지난 삶을 복기해보고 잘한 일, 아쉬웠던 일을 돌아보는 제1길이다. 초반의 길은 온순하다. 슬슬 달리면 된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도자기를 굽고 모여살았다는 도암지를 거쳐, 신나무골 성지로 간다. 영호남 선교 요람지중의 한곳이다. 한옥 석가래로 꽤나 멋스럽게 지어진 건물들이 이어진다. 앞쪽 언덕에는 박해로 희생된 엘리사벳의 무덤이 있다.
잠시 목을 축이고, 본격적인 산길 속 오르막을 향해 페달질을 한다. 전망대를 지나자 양떼목장을 만난다. 양떼들의 목걸이 찰랑대는 소리가 정겹다. 도망치려는 양 한두마리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댄다. 창평지를 지난다. 물빛에 반사되는 정자를 제대로 찍으면 그야말로 작품샷이 나온다. 산길전망대는 포기다. 도저히, 자전거를 밀고서 정상까지 갈수가 없다.

◆ 제3길 뉘우치는 길, 제4길 용서의 길
정말 후회가 된다. 여기를 자전거로 오다니. 동반자들이 궁시렁댄다. 도리없이 자전거를 끌다가 메다가를 반복한다. 쌀바위 구간이다. 경사도 매우 가팔라서 내리막도 연신 미끌댄다. 서너차례 더 궁시렁대니 멋진 경치가 쩍 하니 눈아래 펼쳐진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 " 의미심장한 푯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 그래,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삶은 속도보다는 방향이라고 하는데.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이윽고, 한티가는 길중 가장 멋진 뷰를 자랑하는 '금낙정'에 도착한다. 조선시대 이인부가 강론을 펼친 곳이다. 산아래 까마득하게 웅장한 경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예전에 이 첩첩산중을 어떻게 드나 다녔을까를 생각하니 존경스러워진다. 잠시, 목도 축이며 각자 가방에 메고온 보급품들을 주섬주섬 꺼낸다. 사과랑 영양갱의 인기가 만점이다.

슬슬 뱃속에서 소식도 보내고, 피로감도 조금씩 몰려온다. 산허리를 계속 타고, 여부재로 향한다. 도중에 예쁜 조형물이 난데없이 길을 막는다. 지천면 '한반도 지형' 인증 포인트다. 저 먼발치로 내려다 보니, 제법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 추수철이 되는 가을에는 노란색이 더욱 대비되어 형상이 뚜렸하게 드러난다. 그나저나, 살짝 억지춘향같은 느낌이 드는데 지천면에서는 어떻게 이 지형을 발견했을까?
한편으로 예리한 관찰력을 칭찬하고 싶다. 여부재 가는 길은 다소 지겹다. 길은 단조롭고, 경치도 없고, 길은 삐죽삐죽 돌밭이다. 땀깨나 흘린뒤 재를 넘어서 이제는 송림지로 향한다. 벌써 시계는 1시를 훌쩍 지났다. 동명성당 옆, 한정식 집 앞에 자전거 부대를 세운다. 허겁지겁 누렁지탕까지 싹싹 비우고, 송림지로 향한다. 송림지는 꽤나 그럴싸하게 꾸며놨다. 물위 데크길을 걸어서 구름다리도 건넌다.
동화사의 말사인 송림사에 들어섰다. 544년에 창건된 사찰은 벌써 천년을 훌쩍 넘었다. 대웅전 석가모니불은 보물로도 지정되었다. 사찰은 고즈넉하고 지극히 평화롭다. 산길을 약35키로 정도 타고나니, 서서히 근육도 풀린다. 삼층석탑앞에서 잠시 머리를 조아리고, 힘을 낸다. 이제는 가산산성 진남문을 향해 간다. 꾸준한 오르막이라 결코 쉽지가 않다.

5~6Km는 족히 올라야 한다. 가산산성 이정표가 보이면 자전거는 왼쪽으로 돌아, "원당공소"로 향한다. 가파른 언덕배기에 아담하게 자리잡았다. 병인박해를 피해 신자들의 옛 생활터전 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동명성당 관활로 되어있다. 여기서, 가산산성 진남문을 가려면 가파른 오르막을 아래만 보고 밟아야 한다. 다들 점점 지쳐간다. 드디어, 진남문이다. 성곽을 배경으로 폼생폼사한다. 아직도 갈길이 멀다.
◆제5길 사랑의 길
돌아보고, 비우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이제는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와서 사랑을 베풀어야 할 시간이다. 팔공산 자락 한티재 약 9Km의 오르막은 마지막 인내와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미, 체력은 바닥났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목을 축이고,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서 간다. 약 40~50분여 올랐을까? 캠핑장을 지나, 한티순교성지의 푯말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곧장 성지로 들어섰다.
목표달성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14m 높이나 되는 십자가상으로 이동하는려 참에, 누군가 소리친다. '숯가마 터'도 다녀와야 한다고. 왠걸! 다시 위쪽으로 1Km, 또 거기서 산길을 걸어서 500m다. 상당수 멤버들이 길바닥에 주저않아 산길은 포기한다. 아직도 힘이 넘치는 몇 일행들이 대표 주자를 표방하고 다녀온다.
이제, 다같이 오늘의 피날레를 맞이할 시간이다. 한티순교 성지내 억새마을을 쉬이 한바퀴 돌고, 성지 본관앞 계단위에 다들 털썩 앉았다. 유난히 힘들었던 자전거 순례길 이었지만 벅차 오르는 감동은 큰 보상이다. 다들, 사랑의 하트표를 만들고서 단체 인증샷을 찍는다. 전율을 간직하고서.

그 무렵, 신부님이 나오셔서 한마디 하신다.
"한티가는길은 자전거로 오시는곳이 아니에요"
그래도, 미소다. 사랑이다.
걷는 길이 대세인 시대이다. 올레길, 둘레길, 자락길, 소리길, 바람길, 하늘길, 숲속길, 고도(고도)…. 그 길마다 얘깃거리가 맴돌고, 여운이 여기저기 담긴다. 때론, 슬픔과 치유도 함께 한다. 그 길들을 두바퀴 자전거로 시도해 본다면 또 어떤 감동으로 다가올까? ( 당연히 걷는 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
"한티가는 길, 한티 순교성지 가는 길", 때론 숨가쁘고 땀속에 절었지만 분명, 가슴은 더 뜨거워지고, 머리는 더 맑아진다. "한국의 산티아고길"을 또 달려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여기는 경상북도 칠곡군이다. 럭키 세븐이다.
글·사진 김동영 여행스케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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