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때는 가수 활동을 하던 20대 시절이었어요. 그땐 어딜 가든 팬들이 따라다녔지만 (인생에서) 가장 불행하던 때였습니다. 하루에 11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노래하는 기계'였죠. 40대가 되고 영화도 찍으면서 비로소 편안해졌어요."
배우 이정현은 2일 전주중부비전센터에서 열린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올해의 프로그래머' 기자회견에서 대스타였던 어린 시절이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그는 전주영화제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돼 자신의 취향을 반영해 고른 작품을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GV)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의 연출 데뷔작인 단편 영화 '꽃놀이 간다'도 상영된다.
이정현은 중앙대 연극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9년 가수 데뷔와 동시에 '와'를 히트시키며 테크노 열풍을 일으켰다. 중국에서도 인기를 얻으며 승승장구했으나 늘 마음 속엔 연출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에는 가수 활동도 했지만, 시야도 좁고 철이 없었다"면서 "나이가 들고 아이도 낳으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풍부해져 시나리오를 다시 써보게 됐다"고 말했다.
28분 분량의 '꽃놀이 간다'는 이정현이 연출은 물론이고 주연, 제작까지 맡았다. 제작비 500만원의 저예산 영화인 만큼 그는 촬영장의 '막내' 역할까지 담당했고, 대학원 학생들과 품앗이도 했다. 영화 '반도'(2020)로 연을 맺은 연상호 감독의 스태프가 손을 보태기도 했다.
"전 이 작품에서 연출과 주연, 제작부 막내, 연출부 막내, 의상팀 막내 등을 맡았어요. 조연 배우들 옷을 다림질하다가도 누가 부르면 달려가는 게 다반사였죠. 영화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스태프의 노고가 필요한지 깨닫게 됐습니다."
'꽃놀이 간다'는 이른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모녀를 주인공으로 한다. 치료비를 내지 못해 병원에서 쫓겨난 어머니를 꽃놀이 관광에 보내주려는 수미(이정현 분)의 이야기를 그린다. 2022년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버지가 고독사한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이정현은 "당시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이 사건을 영화로 남기길 원했다"고 말했다.
"판타지나 할리우드 상업 영화도 좋아하지만, 이런 사회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를 접했을 때 더 큰 울림을 느껴요. 앞으로 만들 작품도 비슷한 방향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 단편에는 생활형 범죄를 저지르는 가족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에요."
그는 존경하는 감독 중 하나로 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형제 감독을 꼽았다. 그가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소개하는 영화에도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2006)가 포함됐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2005) 등도 선정했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1996), 박찬욱·박찬경 감독의 단편 '파란만장'(2011), 안국진 감독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 등 이정현의 주연작도 볼 수 있다. 그의 배우 커리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작품들이다.
이정현은 "데뷔작인 '꽃잎'은 저를 배우로 있게 해준 작품"이라면서도 "이 작품 이후 배우로 더 크고 싶었는데 미성년자라 다양한 대본이 들어오지 않아 갈증이 컸다"고 떠올렸다.
이후 테크노 음악에 빠지면서 가수로 데뷔한 뒤에는 영화계로 복귀할 기회의 폭이 더 좁아졌다고 회상했다.
2010년께 우연한 기회에 박찬욱 감독을 만난 것이 그의 연기 인생에서 전환점이 됐다. 박 감독은 그에게 "왜 연기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이정현은 연기를 하고 싶어도 작품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박 감독은 깜짝 놀라며 '파란만장' 주연 배우로 출연해줄 것을 제안했다.
"박 감독님이 '꽃잎'을 너무나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개봉 때 제가 미성년자여서 (청소년관람불가인) 이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했더니 감독님께서 직접 영상을 구워서 CD에 넣어 주시더라고요. '꽃잎'을 절대 잊지 말고, 앞으로도 배우를 꼭 하라고 하셨죠."
이정현은 '파란만장' 출연을 계기로 블록버스터 '명량'(2014), '군함도'(2017), '반도'부터 독립·예술영화인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범죄소년'까지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박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에서도 조연으로 활약했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엔터테이너로 살아온 이정현은 정신적인 평화를 얻은 지금이 행복하다고 강조했다.
"예전에는 관객과 일대일로 얘기하기도, 눈을 마주치기도 부담스러웠어요. 지금은 한 분 한 분이 다 제 여동생, 딸, 엄마 같아요. 끈기도 생기고 책임감도 커졌죠. 이해력과 공감 능력도 풍부해졌습니다. 아마 20대의 저였다면 '꽃놀이 간다'를 찍다가 도망쳤을 것 같아요, 하하."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