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독자이던 시절, 그러니까 책을 쓸 생각은 고사하고 글을 쓸 시간조차 없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일을 하던 때였는데 하루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시간을 때우려고 고심하던 중에 중고책방을 발견했다. 이 책 저책 뒤적이다가 정말 우연히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의 저자 사인본을 발견한 것. 받는 사람 이름까지 적힌 책이 어떤 사연으로 중고책방까지 흘러들어왔을까, 잠깐 생각했던 거 같다. 어쨌든 저자의 친필 사인이 신기해 냉큼 사서는 약속장소로 향했다. 1997년 이맘 때 즈음의 일이다.
중고책방에 종종 간다. 인터넷을 주로 이용하지만, 직접 서점에 가면 뜻밖의 횡재를 할 때도 있기 때문. 그런데 내가 말하는 횡재라는 것이 로또나 코인이나 부동산처럼 모두가 공인하고, 누구나 꿈꾸고 소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내겐 횡재인 책이 다른 이에겐 아무 감흥도 없는 중고서적에 불과한 일이 허다할 테니까 말이다.
수시로 중고책방에 다니기 시작한 건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쓰면서부터다. 책이 출간되고 두세 달. 북토크다 저자사인회다 하며 분주하고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대중의 관심은 점차로 식어가고 책 판매는 지지부진하면서 이리저리 출판사 대표 눈치를 보는 자괴감의 계절이 도래한다. 바로 그때! 책을 산 이들 중에서 일부는 슬며시 중고서점에 책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심지어 저자 사인에 본인 이름까지 적힌 책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는 것. 책이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친구 따라 북토크에 갔다가 어쩔 수 없이 샀기에 팔아버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혹시나(사실은 설마) 하며 가슴 떨리는 마음으로 내 책을 검색한다. 가능하면 없기를, 있어도 사인본은 아니기를, 사인이 있어도 받는 이의 이름은 적히지 않았기를….
첫 번째 책 '영화, 도시를 캐스팅하다'는 시효가 끝날 때 즈음 코로나가 창궐한 덕분에 중고서점에 갈수도 없어서 내상을 입지 않고 넘어갔다. 두 번째 역시 코로나 기간 중에 출간되었기에 비슷했고, 세 번째는 공저였으며 네 번째 책 '호우시절'도 사인본이 내 눈에 띄지 않고 그럭저럭 잘 넘어갔다. 이게, 무조건 기뻐할 일일까? 어떤 책이 중고서점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적게 팔렸다는 얘기. 그러니 중고서점에 나온 책이 없다는 건 결코 반길 일만은 아니다. 실제로 A중고서점에는 유명작가 코너가 따로 있다. 그만큼 많이 팔렸다는 반증이다. 왜곡된 마케팅으로 많이 팔리고 즉시 중고서점으로 직행하는 책도 있겠지만.

출간한지 6개월도 안 된 자신의 책이 중고책방에서 발견된다는 것, 어떤 저자에게도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이왕이면 책도 많이 팔리고, 팔린 책이 독자의 책꽂이에 오랫동안 머무는 것, 모든 저자의 바람일 터. 하물며 친필사인이 적힌 책임에랴.
요즘은 중고서점에 가도 내 책이 있는지 찾아보지 않는다. 애써 기분 찝찝할 일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다짐했기 때문인데, 언젠가 마음이 동하면 다시 검색해볼지 누가 알겠나. 부디 그 책에 사인과 받는 이의 이름이 같이 적혀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아마, 내 성격상 어떻게든 주인을 찾아내거나 이름을 떠올리며 두고두고 원망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님아, 내 사인본은 팔지 마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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