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요일 아침-김태일] 박정희와 김대중, 둘 다 좋다는 사람들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광주·전남에서 하늘 같은 지도자로 존경을 받는다. '하늘 같은'이라는 꾸밈말은 과장이 아니다. 박정희는 대구·경북에서 신에 가깝다. 몇 년 전 경북의 모 시장은 그를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 했다. 김대중은 광주·전남에서 선생님이라 불린다. 속가의 어떤 칭호보다 높은 권위, 가없는 존경을 담은 표현이다.

대구·경북과 광주·전남에서 두 지도자를 그렇게 부르고 자기 지역과 동일시하는 데는 옳고 그름을 떠나 다 이유가 있다. 문제는,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은 김대중을 미워하고 김대중을 따르는 사람은 박정희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두 지역이 지도자를 사랑하는 방식이 극 상찬(賞讚)과 극 멸칭(蔑稱)을 배타적으로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과 감정은 당연히 행동으로도 이어져 두 지도자의 뒤를 잇는 정당에 대해서는 독점적 지지를, 다른 정당에는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두 지역에서는 자기와 동일시하는 정당이 내놓은 인물은 누구든 묻지 않고 투표를 했다. '막대기를 꽂아도, 강아지를 내보내도 당선된다'라는 서글픈 이야기는 그런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유권자행태에 흥미 있는 변화가 감지되었다. 박정희만 절대적으로 따르거나 김대중만 죽어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와 김대중 둘 다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제법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김대중을 둘 다 좋아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둘 다 좋아한다'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유권자행태의 동향과 관련하여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많은 사람들은 한동안 이런 성향의 유권자들을 '기회주의적(opportunistic) 존재'라고 했다.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박정희와 김대중을 둘 다 좋아한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박정희를 좋아한다고 했다가 어떤 때는 거꾸로 김대중을 좋아한다는, 줏대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이런 유권자들은 정당 지지도 한결같지 않았다.

이런 '기회주의적' 유권자들을 대하는 각 정당의 선거 전략은 단순했다. 도덕적, 역사적 정당성을 내세우며 유권자들의 마음을 압박하거나 분노와 열정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불의의 편에 서는 것이고 따라서 역사는 후퇴할 것이며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다는 선동으로 '기회주의적' 존재를 밀어붙이는 방식이었다. 그것으로 전선을 뜨겁게 달구는 것이 선거 전략 기조였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이런 판단과 선거 전략의 적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나타났다. 박정희와 김대중을 다 좋아한다는 유권자들은 '기회주의적 존재'가 아니라 '까다로운(tricky) 존재'라는 해석이 등장했다. '까다로운' 유권자는 어느 한 편을 무조건, 절대적 지적하지 않고 사안별로 조목조목 따져서 지지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김대중은 이런 점에서는 좋지만 저런 점에서는 나쁘다는, 분석적 평가를 내린다. 이분법적 흑백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다.

이 '까다로운 존재'에 대한 각 정당의 선거운동은 밀어붙이기가 아니라 자분자분 설득하는 전략이다. 이들은 각 정당의 정강 정책에 대해 '까다로운' 잣대로 지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외교안보 정책은 이 정당을 지지하고 경제 정책은 저 정당을 지지하며 사회문화 정책은 또 다른 정당의 그것을 지지하는 식이다.

나라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져 이념적, 정치적, 감정적 대결로 날 밤을 새우고 있는 현실에서 박정희, 김대중 어느 한 지도자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좋아한다거나 때에 따라 좋아하는 지도자가 이쪽저쪽 달라진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건 민주 발전에 나쁘잖다.

그들은 이분법적 흑백 대결을 넘어 우리 사회가 진일보하는데 마중물 역할을 한다. 그들은 정치에 대한 정보도, 주체적 판단 능력도 없어서 선동에 휩쓸리는 '기회주의적 존재'가 아니라 충분한 정치적 지식과 자기 주도적 결정 역량을 갖추고 스스로 판단, 참여, 선택하는 '까다로운 존재'다. 이번 선거의 향방도 그들이 결정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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