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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기자의 아웃도어 라이프] 길 위에서 '나'를 돌아보다…'1박2일' 칠곡 한티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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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티아고' 한티가는길을 걷다

김영종 씨가
'한티 가는 길' 1구간 산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산악자전거를 타는 이들도 가끔씩 볼 수 있다. 김도훈 기자
1구간 종료지점인 신나무골 성지. 한옥성당과 오른쪽 사제관이 보인다. 김도훈 기자
김영종 씨가 '한티 가는 길' 3구간 여부재에서 동명성당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다. 김도훈 기자

누구 앞에나 길은 놓여있다. 미래를 향한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어느 길을 걸어갈 건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이런 대답 없는 물음으로 마음이 공허할 때, 문득 떠오르는 길 하나가 있었다. 경북 칠곡군의 '한티 가는 길'이다. 조선후기 전국에서 모여든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수없이 걸었던 길이다. 왜관읍 가실성당에서 동명면 한티순교성지까지 45.6㎞에 걸쳐 이어진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그렇듯, 이 길도 믿는 자에게만 열려 있는 건 아니다. 한적한 숲길은 조용히 걷고 싶은 트레커들에게도 길을 내준다. 신앙인에게는 경건과 엄숙으로, 트레커들에겐 사색과 음유(吟遊)로 다가선다.

다섯 구간으로 나눠진 길을 전부 걷는다면 이틀은 족히 걸린다. 그럼에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수차례 이곳을 찾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 길의 매력을 느껴보기 위해 지난달 30일과 31일 1박 2일 동안 '한티 가는 길'을 걸었다.

'한티 가는 길' 출발지인 왜관읍 가실성당 전경. 김도훈 기자

◆발끝마다 묻어나는 순교자의 삶

팔공산 북서쪽 해발 600m 고지엔 '한티 가는 길' 종착지인 한티가 있다. 조선에선 1791년부터 100여 년간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이어졌다. 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이들은 전국의 여러 산중 깊은 곳에 터를 잡았는데 한티는 그 중 한 곳이다.

이곳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을해박해(1815년) 이후 이곳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톨릭 대구대교구에 따르면 1837년 서울에서 내려와 신나무골(1구간 종착지)에서 살던 김현상이라는 천주교 신자 가족이 기해박해(1839년)로 한티로 와서 살았다고 한다. 이렇게 모여 형성된 교우촌은 1850년대 말에는 더욱 번성했다. 조선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1862년 파리 외방전교회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교우들은 대구와 멀지 않고 한티재 바로 밑이라 달아나기 좋은 한티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엔 점토와 나무, 계곡의 물이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옹기와 사기, 숯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다함께 가마를 만들고 옹기와 사기, 숯을 구워냈고 밤이면 몰래 산을 내려와 주변 장터에 이들을 내다 팔며 살았다.

병인박해(1866년)가 한창 이어지던 1868년 봄, 이곳에도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교인들을 처형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살아남은 교인들은 온 산에 흩어져 순교한 교인들의 시신을 찾아 수습했다. 이때 순교한 신자는 40여명이었다고 한다. 길의 종착지인 한티순교성지 인근, 십자가 묘비마다 이름대신 1번부터 37번까지 번호가 붙어 있는 무덤이 그것이다.

꼭 100년 뒤인 1968년 순교자 성월(9월)에 맞춰 대구대교구 주관으로 신나무골부터 한티를 잇는 33㎞ 구간에서 도보 순례가 시작됐다. 1988년엔 교우촌을 발견했고 1991년엔 한티순교성지에 피정의집이 개관하면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 발걸음이 밑거름이 돼 2016년 칠곡군은 개청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한티 가는 길'을 개통하게 된다.

1구간 종료지점인 신나무골 성지. 한옥성당과 오른쪽 사제관이 보인다. 김도훈 기자

◆고관절 통증에 땀은 비오듯

김영종(대구문화예술진흥원 예술진흥팀 과장) 씨에게 '한티 가는 길' 안내를 부탁했다. 그는 직장 내 백패킹 동아리 회장으로, 이 길을 다섯 차례 이상 걸었고 지난 3월엔 전 구간을 1박2일로 종주한 경험자다.

30일 오전 5시 40분쯤 5구간 종착지인 한티순교성지에 차를 세워두고 김영종 씨와 만나기로 한 1구간 출발지인 왜관 가실성당으로 향했다.

가실성당은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1895년 기와집으로 지어졌다가 신자가 늘면서 명동성당을 설계한 박도행 신부의 설계로 1923년 새로 지었다고 한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속았수다' 속 웨딩 장면 촬영지로 주목받은 곳이다.

성당을 잠시 둘러본 뒤 7시 30분쯤 길을 나섰다. 성당 오른편으로 '한티 가는 길' 입구가 있다. 1구간은 가실성당에서 전망테크, 금무봉 나무고사리 산지, 도암지, 신나무골 성지까지 10.5㎞ 거리다. 30분쯤 마을길을 걷고 나면 산길로 접어든다. 가실성당에서 3.9㎞ 떨어진 전망데크도 못 왔는데 벌써부터 다리가 무겁다.

오전 9시쯤 나무고사리 산지를 지난 뒤 길을 놓쳤다. 왔던 길을 오가며 원래 길을 찾아 헤메다 포기하고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활용해 도암지로 향한다. 그 사이 땀은 비 오듯 흘러내리고 다리에 피로는 더욱 쌓여갔다.

오전 10시 30분쯤 도암지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1시간 쯤 지체됐다. 이곳 도암마을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와서 도자기를 굽고 살았다고 해서 도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암지 입구 휴게쉼터엔 무인으로 운영되는 냉장고가 있다. 이곳에서 물이나 빙과류, 맥주 등을 구입할 수 있다.

30분 정도 땀을 식힌 뒤 길을 나서 오전 11시 30분쯤 신나무골 성지에 도착했다. 신나무골은 을해박해 무렵부터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이 있고 순례자를 위한 카페가 마련돼 있다. 이곳에서 시원한 음료와 함께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1시쯤 다시 길을 나섰다.

2구간은 신나무골 성지에서 사기점 공소까지 9.5㎞ 구간이다. 신나무골을 벗어나면 임도길이 길게 이어진다. 완만한 경사인데도 35도까지 치솟은 기온 때문인지 힘겹다. 평소 좋지 않은 고관절 통증에 오른쪽 새끼발까락에 물집까지 잡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길까지 잃었다. 출발지에서 3.5㎞ 떨어진 전망쉼터에서 댓골지 방향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은 탓이다. 이 사실을 안 건 이미 2㎞ 이상 지난 뒤였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돌아가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산을 내려간 뒤 다음 포인트인 양떼목장 시작지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결국 4시간 거리를 6시간 30분 만인 7시 30분쯤에 2구간 종료지점인 사기점 공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1, 2구간 합산 20㎞거리를 7㎞나 돌아서 도착한 것이다.

원래 1박을 하려던 장소는 이곳에서 3㎞정도 떨어진 3구간 금낙정이었다. 하지만 고관절 통증이 심해진 탓에 사기점 공소에 마련된 여행자 쉼터에서 저녁을 먹고 마당에 텐트를 친 뒤 일과를 마무리했다.

'한티 가는 길' 2구간 종료지점인 사기점 공소에 마련된 여행자 쉼터. 이곳 마당에 텐트를 치고 1박을 했다. 김도훈 기자

◆인생살이와 닮은 길

밤새 통증으로 뒤척였다. 발포 매트리스 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눕지도 못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목표했던 완주는 아니더라도 3구간까지는 마칠 수 있길 다짐했다. 1박2일 동안 전 구간 완주를 계획했던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코스의 절반은 넘기고 싶었다. 게다가 각 구간에 대한 우열을 가릴 수도 없고 크게 의미 있는 일도 아니지만, 굳이 최고를 꼽자면 상당수 사람들이 3구간을 언급하는 이유도 궁금했다.

날이 밝았다. 오전 6시 30분쯤 일어나 아침식사를 한 뒤 8시쯤 길을 나섰다. 동명성당까지 9㎞ 서너 시간 거리를 천천히 다섯 시간 정도에 마치는 것으로 목표를 잡았다.

인간의 욕심을 곱씹어보게 하는 쌀바위와 금낙정, 여부재를 지나 오후 1시쯤 동명면에 도착했다. 면사무소 인근 식당에서 물회로 점심식사를 하고 동명성당 내 순례자의집에서 이틀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가실성당을 출발한지 서른 시간 만이었다.

한티순교성지에 세워둔 차를 찾아 돌아오는 길. '한티 가는 길'을 생각했다. 이 길에서 뜻하지 않게 두 차례나 길을 놓쳤다. 지난해 겨울, 하루 운행거리가 비슷한 한라산 성판악코스(왕복 19㎞)를 다녀올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몸의 피로는 심각할 정도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고관절 통증도 경험했다. 이로 인해 계획했던 첫날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고, 완주라는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 달리하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번 여정처럼 뜻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길은 묻는다. '그대 어디고 가는가.' 한티 가는 길의 부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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