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1월 대구는 이른바 '대(大)대구 건설'로 부산했습니다. 앞서 1965년 2월 10일 발표된 '대대구 건설' 계획은 대구 인구가 10만 7천명이던 1936년 일제 강점기에 첫 도시계획을 한 이래 29년 만. 그새 인구가 80만(1965년)으로 불어나 10년 뒤(120만명 추산)를 대비해 대구 지도를 새로 그리는 대역사였습니다.
구릉지 동대구는 신축 중인 동대구역을 중심으로 부도심을, 들판이 좋은 서대구는 주택지와 제2공단이 낙점됐습니다. 한옥이 즐비한 남대구는 두류산과 앞산에 대공원을, 대구역을 낀 북대구는 제3공단을 조성키로 했습니다. 도로망은 동서관통로(현 달구벌대로)를 비롯해 3개 순환선에 5개 방사선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기로 했습니다.
청사진은 가히 매머드급. 그러나 시작부터 험난했습니다. 사업을 추진할 국고 보조금이 내년(1968년) 예산에서 대부분 빠졌습니다. 연초에는 착공됐어야 할 동서관통로와 기공식을 가진 제3공단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 알고보니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1971)이 3년 반으로 단축돼, 지방에 내려올 돈줄이 마른 탓이었습니다.
"서문·교동시장을 불하(拂下), 55억 염출(捻出)해 도시 개발에" 그해(1967년) 11월 14일자 매일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공설시장(시유지)인 서문시장 부지 9천89평(30,047㎡)과 교동시장 내 시유지 약 3백평(992㎡)를 민간에 팔아 돈을 만들겠다는 것. 이와 함께 서문시장 사진기사도 실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8월, 서문시장은 2지구를 시작으로 1지구(1973년), 3·4지구(1974년), 5지구(1975년)가 잇따라 민간에 매각됐습니다. 이 과정에 영세 상인들은 가게를 떠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은 대(大)대구 건설로, 오늘의 대구 기틀을 닦는 밑천이 됐습니다.
당시 서문시장 일대를 촬영한 필름을 어렵게 찾았습니다. 시장 주변 시가지를 조금씩 겹쳐 촬영한 필름은 모두 4컷. 필름을 스캔해 포토샵 포토머지(Photomerge)에서 서로 붙여 봤습니다. 58년 전 모습이 생생한 파노라마로 되살아났습니다.
1967년 11월 서문시장은 2지구와 5지구를 빼고는 현대식으로 지은 콘크리트 2층 건물(1·3·4지구). 7년 전 목조 상가를 홀라당 태운 대화재를 겪으면서도 한강 이남에서 제일가는 장터임을 웅변하듯 저렇게 다시 일으켰습니다.
시장 너머 주택가는 기와집 사이로 초가가 옹기종기 자리를 지키고 섰습니다. 달성공원은 일제의 잔재 대구신사(神社)를 헐고(1966년) 서울 창경원 다음 가는 동물원 개장(1970년)을 예고했습니다.
그 후 58년. 이곳은 또 다른 변화를 준비중입니다. 계성중학교 부지에는 2032년 국립 대구독립역사관이 들어서고, 달성공원은 동물원을 옮긴 뒤 옛 토성으로 재 모습을 되찾을 예정입니다.
공원 왼쪽 언덕 주택가는 5세기 중후반 신라시대 고분이 무려 87기나 산재한 달성고분군이 있던 곳. 1923년 이곳 무덤에서 신라 금관을 빼닮은 금동관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미발굴 상태로 주택이 들어서, 고분 발굴은 숙제로 남았습니다.
공원 옆 대성초교는 월드스타 방탄소년단(BTS) 멤버 '뷔'(본명·김태형)가 뛰어 놀던 모교. 교정 담벼락은 그를 응원하는 60m 길이의 벽화거리가 조성돼 핫 플레이스가 됐습니다.
안타깝게도 서문시장 4지구는 1975년에 이어 2016년에 또 화마에 당해 상인들이 9년째 속앓이 중입니다. 돌아보면 오늘의 대구를 위해 밑거름이 됐던 서문시장. 해방 이후 10여 차례 화재에도 오뚝이처럼 일어섰 듯 이젠 시민들이, 대구시가 따듯한 관심을 가질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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