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역사는 종종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 서문시장과 청라언덕, 북성로를 잇는 골목 사이사이 발걸음이 뜸한 곳을 돌아보자. 평범한 길목은 '대한민국 만세'가 울려 펴졌던 자리다. 표지석과 계단 몇 칸, 낮은 지붕의 마당은 지금도 그날의 흔적을 묵묵히 붙들고 있다.
◆ 시장 한복판에서 터진 만세
대구 제일교회를 지나 서문시장으로 걷다 보면, 재개발을 앞둔 서문시장 상가가 보인다. 헐릴 건물을 둘러싼 회색 바리케이드는 거리의 온기를 차단한 듯 을씨년스럽다. 그 앞, 바닥에 오목하게 자리한 작은 조형물 하나가 있다.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의미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대구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유일한 표지석이다.
1919년 3월 8일 오후 2시. 장날을 맞은 시장은 평소처럼 사람들로 붐볐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군중의 품에는 태극기가 숨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강렬한 항일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만집과 김태련이 사람들 앞에 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학생과 주민, 종교인 등 1천여 명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이날을 기리고자 표지석은 2010년 3월 1일 세워졌다.
◆ 감시 피해 오르던 90계단
청라언덕으로 향하는 오르막에는 좁고 길게 뻗은 90계단이 이어진다. 계단 곳곳에 걸린 태극기가 이곳의 성격을 말해준다. 90계단은 대구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대구3.1운동 당시, 운동 참여를 계획하고 있던 학생들은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고자 90계단을 애용했다.
그때의 역사는 벽면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그 중 '대구고보' 학생들의 결의에 가득 찬 단체 사진은 단연 눈길을 끈다. 교장과 교사 대부분이 일본인이었지만, 200명이 넘는 학생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옥고를 치렀다.
'신명학교' 학생 40여 명도 함께 만세를 외쳤다. 당시 신명여중 2학년이던 김학진 할머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언니들이 말하기를, 공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일제의 압제 밑에 있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거다. 그 말은 우리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기숙사 이방 저방 쫓아다니며 태극기 만들기와 의복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 교육으로 키운 저항의 씨앗
북성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재개발 이후 들어선 아파트들이 하늘을 가로막는다. 그 아래 늘 그늘진 자리에 '우현하늘마당'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남 이일우 선생의 고택을 전시관으로 꾸민 공간으로, 우현서루의 역사를 전한다.
'우현'이라는 이름에는 역사 속 현자들을 벗으로 삼겠다는 뜻이 담겼다. 우현서루는 1904년, 이일우 선생의 부친 금남 이동진이 세웠다. 이후 이일우가 이를 이어받아 교육기관이자 도서관으로 운영했다.
교육을 통해 일제에 맞설 정신을 기른다는 철학 아래, 150여 명의 애국지사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총 150여명의 애국지사가 우현서루에서 성장했다. 이일우 선생의 조카인 이상화뿐만 아니라 이육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 박은식,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등이 이곳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일우 선생의 가족들은 교육의 뜻을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그의 자손들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셋값을 낮추고 기부를 이어가며, 일제에 짓눌린 시민들의 삶을 보듬었다.
이들을 길러낸 이일우 선생의 생가인 우현 하늘마당은 눈에 띄게 지붕이 낮다. 하늘이 높으니 하늘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하고, 돈이 있어도 돈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는 이씨 집안의 '겸손'이 녹아있는 설계다.
◆ 이름 없이 이어진 또 하나의 이야기
아쉽게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파란만장한 독립투사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우현서루의 하늘을 가린 아파트 부지와 백화점 '무영당' 근처에는 1967년 설립된 현재의 대구은행(iM뱅크)과는 별개로, 1913년에 설립되었던 일제강점기 옛 대구은행이 있었다.
의열단 부단장이던 이종암 열사가 의열단 창단의 자금줄을 마련한 곳이다.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부산상고를 중퇴한 그는 1914년 대구은행에 취직했고, 불과 1년 만에 출납계 주임으로 승진했다.
시간은 흘러 1917년 12월, 마감 시간 5분이 지난 순간. 한 상인이 1만5천원(현재 가치 약 10억원)을 들고 은행을 찾았다. 이종암 열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돈을 들고 만주로 달아났다. 의열단의 활동 기반이 된 돈이었다.
이종암 열사는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열사였다. 쇠약해지는 몸을 이끌고도 동경에서 거사를 치르겠다며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됐다.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1930년 5월 29일 순국했다.
표지석은 작고, 계단은 낡았고, 마당 위 하늘은 가려졌고 건물은 사라졌다. 대구 독립운동의 현장들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지만, 일부러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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