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계희의 법도 문학도 아닌] 상습 결혼사기범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김계희 변호사
김계희 변호사

'그는 슬픈 눈길로 자신의 구두를 바라보았다. 이것 역시 대대적인 수선을 요하는 낡은 구두였다. 그는 길고 살점이 별로 없는 코에 옅은 하늘색 눈을 가진, 시든 듯한 자그마한 남자였다. 피부색은 나쁘고 주름이 많아 쭈글쭈글했다. 나이가 몇 살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서른 정도로도 예순 정도로도 보인다. 튀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 내세울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남자였다. 가난한 사람이란 건 분명했지만, 의외로 차림새는 단정했다.'

서머셋 몸은 열한 번이나 여성을 유혹하여 상습 결혼사기범으로 교도소를 다녀온 남자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위 '제비'라고 불리던 사기 피의자가 유독 많았던 검사실에서 검찰 시보로 만났던 그들은 놀랍게도 소설 속 결혼사기범과 같은 빈상의 남자들이었다.

사기 고소를 하려 한다고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상대방이 언제까지 틀림없이 돌려주겠다 해서 돈을 빌려주었는데 여태 그 돈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를 속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결과적 사기범'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형법상의 사기죄는 그리 간단치 않다. 사기죄는 타인을 기망하여 착오에 빠뜨리고 그로 인하여 피기망자(기망행위의 상대방)가 처분행위를 하도록 유발하여 재물 또는 재산상의 이익을 얻음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이다. 따라서 사기죄가 성립하려면 행위자의 기망행위, 피기망자의 착오와 그에 따른 처분행위, 그리고 행위자 등의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의 취득이 있고, 그 사이에 순차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하여야 한다.

당시 30대의 주임검사는 이들에게 사기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의 기망행위라는 것이 자신이 보기에는 청혼하는 남자의 상투적 문구인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주겠다'라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결혼하는 여자가 없는 것처럼 그녀들도 그들의 거짓말에 속아 무언가를 사주거나 돈을 보낸 게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망행위와 처분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그러면서 같은 여자가 보기에 저런 외모에 그런 거짓말에 속는다는 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하지만 실상은 저런 외모였기에 그가 자신을 속일 리 없다고,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라고 그녀들이 철석같이 믿었다는 게 피해자인 그녀들의 공통된 진술이었다.

물론 소위 '로맨스 사기'가 그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직은 압도적으로 그의 범죄가 많은 것은 속이는 내용이 본질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재력, 학력 등을 속이면서 그녀에게 일시적 도움을 청한다. 일시적 도움은 그녀와 함께할 빛나는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속인다. 그의 속임이 이처럼 과시형이라면 그녀의 경우는 읍소형이 대부분이다. 가족의 병원비, 과도한 채무로 인한 경제적 곤궁과 채권자 측의 위협 등으로 속이면서 그녀와 함께할 미래를 꿈꾸는 그가 기꺼이 지갑을 열도록 만든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미혼이라며 그와의 결혼을 약속했는데, 사실은 법적인 배우자가 따로 있어서 결혼 약속이 명백한 거짓말인 경우 등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그가 그녀를 사기죄로 고소하는 경우는 일단 그 수가 많지 않다. 그녀는 돈을 갚겠다고 하였지만, 읍소의 내용으로 보건대 그는 그녀의 말을 믿어서 돈을 건넨 것이 아니었기에 사기죄는 성립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동종 전과, 시기적으로 겹치는 다수 피해자의 진술 등으로 검사실에서 만난 그들을 사기죄로 기소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그가 말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녀들이 무엇을 믿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은 그의 말을 믿은 것이 아니라 는 것을. 편안하고 정감 있는 목소리. 대화 상대방의 기분이나 마음을 읽어내는 감수성과 그에 따른 대처능력이 그를 피의자로 마주한 나조차 '아……'할 정도였으니 그녀들이 그를 믿은 것이 주임검사의 생각처럼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구나 싶었다.

생뚱맞게도 이 대목에서 문득 영화 <파리, 텍사스>의 한 장면, 붉은 스웨터를 입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Every man has your voice."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28일 매일신문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대미투자 문제에 대한 민주당의 무관심을 비판하며, 민주당이 대미투자특별법을 두 ...
대구시와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은 일본 IP 특화 게임 퍼블리싱 기업과 MOU를 체결하고 게임 개발 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나 내부 사정으로...
60대 A씨가 소음 문제로 이웃을 공격한 사건에서 항소심 재판부는 A씨의 형량을 징역 5년으로 늘렸다. A씨는 지난해 7월 소음을 듣고 찾아...
프랑스 전직 상원의원 조엘 게리오가 여성 의원을 성폭행할 목적으로 엑스터시가 들어간 술을 건넨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며, 피해자인 상..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