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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80년,격동 80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5·16 군사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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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가운데)이 1961년 5월 18일 육사생도 800명의 5.16 군사정변 지지 시가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왼쪽은 박종규 소령, 오른쪽은 차지철 대위 모습.
박정희 소장(가운데)이 1961년 5월 18일 육사생도 800명의 5.16 군사정변 지지 시가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왼쪽은 박종규 소령, 오른쪽은 차지철 대위 모습.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 세력은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진입했다. 이들은 주요 국가기관을 신속히 장악하며 제2공화국 장면 정부를 무너뜨리는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 혼돈의 제2공화국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그해 8월 윤보선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장면이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하지만 민주당은 신·구파로 갈려 대립했다. 1961년 2월에는 아예 신파가 따로 신민당을 만들었다. 집권여당이 쪼개진 것이었다. 장면 총리는 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통치력은 날로 약화됐다. 4·19 이후 처벌받지 못한 부정선거 관계자들에 대한 민심의 분노 역시 들끓었다.

경제 상황도 악화됐다. 1천만 명 노동인구 중 240만 명이 완전 실업자였고, 200만 명은 잠재 실업자였다. 노동인구의 거의 절반이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장면 총리 정권은 경제발전 계획을 만지작만 거릴 뿐 경제난 수습에 전혀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데모 천국인 상황에서 벌어진 극심한 이념적, 정치적 혼란이었다. 1960년 8월부터 1961년 5월초까지 약 2,000여 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참가 인원은 100만 명에 이르렀다. 거기에다 1960년에만 침투한 간첩이 100명 넘게 체포됐다. 사회 전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1961년 5월 17일자 매일신문 1면에 실린 5.16군사정변 관련기사. 정권을 인수한 군사혁명위는 민·참 양원과 지방의회를 해산하고 정당·단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1961년 5월 17일자 매일신문 1면에 실린 5.16군사정변 관련기사. 정권을 인수한 군사혁명위는 민·참 양원과 지방의회를 해산하고 정당·단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 무혈(無血) 군사정변, 완전 성공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 내부에서는 국가 재건을 위한 변화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1950년대 미국 유학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단련된 육사 8기 출신 영관급 장교들은 서울 근교 부대와 공수단·해병대·포병 병력을 비밀리에 규합했다. 거사 시도는 세 번 실패했다. 1960년 5월8일 첫 거사계획은 4.19 학생혁명의 발발로 중단됐다. 또 4·19 1주년에 맞춘 첫 계획도 무산됐고, 5월 12일 거사안은 정보 누설로 취소됐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5월 16일이 최후의 D데이로 확정됐다. 쿠데타설은 이미 군 안팎에 파다했다. 정보기관이 여러차례 첩보를 올렸고, 장면 총리와 국방장관도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직접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도영은 "박정희 소장은 그럴 위인이 못 됩니다"는 취지로 보고했으며, 수뇌부는 안심했다. 그것이 결정적 오판이었다.

당일 새벽, 육군본부가 접수됐다. 주력은 서울시청에 진주했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오전 4시 30분경 각각 장악했다. 장면 총리는 이미 혜화동 칼멜수녀원으로 몸을 숨긴 뒤였다. 이날 오전 5시,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령을 통해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에 국가의 운명을 더는 맡겨둘 수 없다'고 선언했다.

1961년 6월 5일자 매일신문 3면에 실린
1961년 6월 5일자 매일신문 3면에 실린 '박정희 소장, 본사 기자와 단독회견' 기사. 박정희 소장은 6월 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실에서 혁명 이후 국내 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매일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갖고, 향후 정국 운영 방향과 군정 구상을 밝혔다. 당시 군사정변 직후의 긴박한 정세 속에서 이루어진 이 회견은 언론과 군정 권력 간 첫 공식 접촉으로 주목받았다.

◆ 미국의 방관 속 성공한 군사정변

군사정변의 성패를 가른 또 하나의 변수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군사행동에 반대했지만, 장면 정권의 무능과 허약한 지도력을 더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헌정 수호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으나 실질적 군사 개입은 없었다. 미국은 군부의 불법적인 권력 장악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었지만, 적극적으로 막지도 않았다.

진압 의지를 보인 1군사령관 이한림이 있었지만, 미국의 모호한 태도와 "국군끼리 피를 흘릴 수 없다"는 윤보선 대통령의 입장 속에 진압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 결과 5·16은 사실상 큰 저항 없이 진행됐다.

1961년 5월 18일 서울 도심. 5·16 군사정변 직후 육군사관학교 생도 800명이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는 가운데 시민들이 거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1961년 5월 18일 서울 도심. 5·16 군사정변 직후 육군사관학교 생도 800명이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는 가운데 시민들이 거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혁명 이틀째인 18일 육사생도 800명은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했다. 이 광경은 민심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혁명군은 약 60여 시간 만에 정권 장악에 성공했다. 이날 장면 내각은 총사퇴했고, 군사혁명위원회는 곧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돼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했다. 이어 6월 10일 중앙정보부가 창설됐으며, 정치활동 정화와 언론 통제가 본격화됐다. 7월3일 장도영마저 축출되면서 박정희는 군정의 실질적 지도자로 부상했다.

5·16 이후 추진된 경제개발 정책은 한국을 절대적 빈곤에서 중진국으로 끌어올린 '한강의 기적'의 물적 토대를 놓았다. 1인당 국민총소득 92달러에 불과했던 1961년의 대한민국이 불과 65년 후 4만 달러를 향해 달리는 선진 산업국가로 변모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판론자들도 성장의 결과는 인정하되, 그것이 민주주의의 희생 위에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결국 5·16 군사정변은 한국 현대사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키워드

5·16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거리 였다.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이를 '5·16 군사 혁명'으로 표현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역사 교육 과정과 법적 정의는 5·16을 '군사 정변(쿠데타)'으로 규정하고 있다.

5.16 군사혁명에 성공한 뒤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습을 나타낸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장도영과 부위원장 박정희.
5.16 군사혁명에 성공한 뒤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습을 나타낸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장도영과 부위원장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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