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지방선거에서 사상 초유(初有)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서울 송파구 등 투표소에선 투표가 중단돼 유권자들은 대기번호표를 받아 들고 오후 10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헌법에 보장된 참정권을 선관위의 무능과 태만 탓에 침해당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잠실 올림픽공원 개표소 앞에 모여 항의 시위를 했다. 그런데 서울경찰청장은 이들을 향해 "아무 생각 없이 불법행위에 동조했다가 공범으로 적용될 경우 '패가망신'(敗家亡身)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패가망신은 '가산을 탕진하고 몸까지 망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다. 봉건·왕정시대도 아니고, 민주공화국에서 서울경찰청장이, 그것도 국가의 중대한 선거 부실에 항의하는 주권자들을 향해 사용할 말이 아니다.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막는 '죄형법정주의'에도 정면으로 위배된다. '법률 없이는 범죄도, 형벌도 없다'는 게 우리 헌법, 형법의 기본 중 기본이다. 법전에 존재하지도 않는 '패가망신' 운운하며 국민을 겁박하는 것은 서울경찰청장이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시위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적(私的) 검문이나 폭력, 모욕 등 위법행위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사·처벌하면 된다. 특수강요·감금·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엄정 수사하겠다는 것에 이론은 없다. 그런데 '집안 망하고 몸까지 망친다'는 감정적·극단적 표현까지 동원해 겁을 주는 것은 문제의 본질인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힘으로 억누르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경찰은 정권과 선관위의 부실을 가리는 방패막이가 아니다.
집회의 자유는 헌법 제21조에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돼 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에 의해 참정권을, 법을 집행하는 경찰에 의해 집회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침해당하는 기가 막힌 상황을 연달아 맞았다. 주권자의 시위와 항의를 범죄시하고 겁박하는 경찰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한 경찰인가. 서울경찰청장은 어느 법 몇 조 몇 항에 의거해 국민에게 패가망신을 경고했는지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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