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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의 한국 반도체산업 비하인드] 4MD램 반도체 개발의 숨은 주역은 전두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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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 22일 '초고집적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안)' 서명
879억 원 연구개발비 프로젝트, 국가 최우선 국책과제 탄생

전두환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은 "4MD램 반도체 개발비가 얼마가 들든 정부가 책임진다"라면서 이병철·정주영·구자경 회장에게 3사 공동개발을 권유했다.

한국 반도체 업계의 숙원 과제는 차세대 메모리인 '4MD램'의 국내 독자 개발이었다. 반도체 분야의 최첨단 기술인 4MD램을 우리 기술로 독자 개발한다면, 한국 전자산업은 미·일의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길을 걷게 된다. 전문가들은 하루빨리 4MD램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녹록지 않았다. 이 분야 선두 주자인 삼성이 64KD램·256KD램을 출시하며 그룹 전체가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적자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를 불안하게 여긴 정부 내에서 강력한 반대 목소리가 끝없이 제기되었다. 반도체산업에 찬성하는 부처인 체신부·과학기술처·상공부는 저마다 부처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개발 주도권을 자기가 맡아야 한다며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4MD램 반도체 개발 계획을 수립한 박승덕 당시 과학기술처 연구개발실장. 박 실장은 4MD램 반도체 개발 사업을
4MD램 반도체 개발 계획을 수립한 박승덕 당시 과학기술처 연구개발실장. 박 실장은 4MD램 반도체 개발 사업을 '대통령 프로젝트'로 격상시킨 주인공이다.

혼란의 와중인 1985년, 국가 연구개발 정책을 총괄하는 과기처 연구개발조정실장에 박승덕이 임명되었다. 그는 육사를 졸업(12기)하고 소대장 생활을 마친 후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 기계공학 석사, 캐나다 오타와대학교에 국비 유학하여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모교인 육사 교수, 한국기계연구소장, 과기처 기술정책실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을 역임한 한국형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다.

며칠 후 육사 11기 출신 김성진 과기처 장관이 육사 1년 후배인 박승덕 실장을 집무실로 불렀다. 당시 과학기술계 최대의 화두는 '4MD램 반도체 개발'이었다. 뜻은 간절했지만,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천문학적인 연구개발비가 요구되는 분야인 데다가 최첨단 기술 분야여서 누구도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국내 3대 반도체 기업(삼성·금성·현대)은 심각한 적자의 수렁에서 신음하며 그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김성진 과기처 장관은 박승덕 실장에게
김성진 과기처 장관은 박승덕 실장에게 "정부가 연구개발비를 지원하여 4MD램 반도체 기술개발 방안을 마련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김성진 과기처 장관의 결단

강진구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은 "기업 단독으로 4MD램 개발은 자살적 모험의 길"이라며 국가의 도움을 절실히 호소하고 나섰다. 김성진 장관은 육사 후배 박승덕 실장에게 결연하게 입을 뗐다.

"4MD램 반도체 연구개발은 대기업이 하는 사업이어서 정부가 지원하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지금은 평시가 아닌 비상 상황이오. 정부가 지원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보시오."

당시 정부의 국가 전체 연구개발 예산은 고작해야 연간 600억 원으로, 당장 발등의 불인 기초연구 과제와 영세 중소기업을 지원할 연구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 대기업에 국민 세금으로 거액의 연구비를 몰아주는 것은 특혜 시비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게다가 4MD램 개발비는 정부 특정연구개발비를 통째로 털어 넣어도 모자랄 정도로 거액이 요구되었다. 박 실장은 여러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했다. 김 장관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미국과 일본은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피 말리는 반도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런 시기에 우리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도체 기업들을 도와 기술 자립을 이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박승덕 실장도 심정적으로는 김 장관과 같은 입장이었다. 다만 한정된 재원과 여론의 향배가 걸림돌이었다. 만약 반도체가 기술 자립을 못 하면 한국의 미래 산업은 영원한 기술 종속을 면치 못할 것이 뻔했다. 특단의 타개책이 필요했다. 오랜 고민 끝에 박 실장은 정부와 민간, 학계와 연구소 공동 연구개발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4MD램 개발을 국가와 민간 공동 연구 사업으로 추진하되, 과기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컨트롤타워로 삼아 지원하는 방안이었다. 이 안을 가지고 이해가 엇갈리는 상공부·체신부·경제기획원 실무자들을 설득했고, 관계 부처가 합의하여 돌파구가 열렸다.

◆"4MD램 연구개발비 정부 부담" 선언한 전두환

4MD램 반도체 개발은 3년의 세월과 당시 국가 연구개발 1년 치 예산을 초월하는 총 879억 원(당시 환율로 1억 달러)이 투입되는 단군 이래 최대의 과학기술 프로젝트였다. 게다가 자존심 강한 라이벌 기업이자 서로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삼성·금성·현대가 공동개발에 참여할 것인지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일본은 D램 제조사만 10개가 넘었다. 이들은 한편에선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른 편에선 공조하여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한국이 반도체 전쟁에서 생존하려면 반도체 3사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야만 반도체 생산 장비 국산화도 가능했다.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공동연구를 하려면 '절대적인 국가적 권위'가 필요했다. 박승덕 실장은 고심 끝에 이 과제를 '대통령 프로젝트'로 격상시켜 통치권자의 서명을 받아내기로 결심했다.

1986년 8월 22일 '초고집적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안)'을 보고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단호하게 이 서류에 서명했다. 879억 원이란 초유의 국가 연구개발비가 걸린 프로젝트가 국가 최우선 국책과제로 탄생한 것이다.

이날 전 대통령은 결재 서류 여백에 "전자통신연구소장은 전 연구원의 인사권을 장악해야 하며, 3사(삼성·금성·현대)는 공동운명체로서 연구소장의 지휘에 순응 협조해야 함"이란 메모를 남겼다. 국책연구소장에게 사기업 연구원을 지휘하는 전권을 부여하는 동시에, 3대 대기업에겐 "기업 이기주의를 버리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 '공동운명체'로 복종하라"는 통치권자의 엄중한 명령이었다.

당시 반도체 3사는 서로의 입장이 크게 달랐다. 사용 장비와 공정 방식이 달랐고, 해외 기술 도입선과 보유 기술력도 격차가 컸다. 삼성은 수년간 피눈물 나는 적자를 감수해 가며 1MD램 개발을 마친 상태였다. 기술적으로 월등히 앞서 있던 삼성이 후발주자인 현대·금성과 핵심 기술 노하우를 공유하는 공동개발에 선뜻 나설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전 대통령은 반도체 3사 회장을 청와대로 전격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4MD램 개발비는 얼마가 들든 정부가 책임지겠다"라고 선언했다. 이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 과제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성공시켜야 한다면서 3사가 한마음으로 뭉칠 것을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서명한 4MD램 반도체 개발 프로젝트인
전두환 대통령이 서명한 4MD램 반도체 개발 프로젝트인 '초고집적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안)' 기안 서류. 서류 여백에 "전자통신연구소장은 전 연구원의 인사권을 장악해야 하며, 3사(삼성·금성·현대)는 공동운명체로서 연구소장의 지휘에 순응 협조해야 함"이란 메모를 남겼다.

"나는 이병철 삼성 회장과 정주영 현대 회장, 구자경 금성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반도체 공동개발을 권유했다. 아울러 막대한 개발 비용의 상당액을 정부에서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중략) 반도체산업은 국가경쟁력 확보와 경제 성장 동력 강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따라서 난관이 있으면, 있는 대로 극복해 나가면 되는 것이라고 나의 강한 의지를 밝혔다."(전두환 지음, 『전두환 회고록(2): 청와대 시절 1980-1988』, 자작나무숲, 2017, 223쪽)

통치권자의 확고한 의자와 파격적인 재정 지원 약속에 3사 회장은 흔쾌히 "국가적 대업에 동참하겠다"라고 화답했다. 연구개발 기간은 1986년 8월부터 1989년 3월까지 총 30개월. 정부는 불퇴전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이 사업의 공식 명칭을 '대통령 프로젝트'로 못 박았다. 마침내 한국 반도체 역사를 바꿀 4MD램 개발의 거대한 엔진에 시동이 걸린 것이다. 공교롭게 4MD램 반도체 개발에 앞장선 김성진 장관, 박승덕 실장, 전두환 대통령 모두 육사 출신이었다. 육사 출신들이 대한민국 경제의 운명을 바꾼 셈이다.

이처럼 비장한 4MD램 공동개발이 시작된 다음 해인 1987년부터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미국 PC 시장이 긴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면서 세계 반도체 경기가 들썩인 것이다. 글로벌 PC 메이커들은 성능은 뛰어나지만, 가격이 비싼 1MD램 대신, 경제성 뛰어난 256KD램을 주력 메모리로 채택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일본 반도체 업계는 256KD램 생산량을 크게 줄이고, 1MD램을 주력으로 삼아 공급 중이었다.

이 미묘한 타이밍이 뒤늦게 256KD램 시장에 뛰어든 삼성에 결정적 기회로 작용했다. 삼성 반도체의 시장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개당 1달러였던 256KD램 가격이 12달러, 개당 50센트였던 64KD램마저 6달러로 껑충 뛰었다. 삼성은 1988년 한 해 동안 64KD램 5천만 개와 256KD램 8천만 개를 싹쓸이 판매했다.

그 결과 1988년 한 해에 무려 1천649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이래 5년여 쌓였던 누적 적자 1천200억 원을 단숨에 털어내고도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관료들의 반대 속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용단으로 수도권 규제를 뚫고 일궈낸 기흥 256KD램 전용 제2라인이 마침내 한국 반도체 역사상 최초의 흑자라는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펜앤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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