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경제인-이원만 코오롱창업주

열여덟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원만은 당시 도평의원이던 재종형 이원기의도움으로 일본인지사를 만나고 경북산림조합기수보란 직책을 얻는다. 그러나고향 영일에서의 산림기수보생활은 십년만에 끝난다.**일본서 배달원 생활**

일본에서는 조금만 머리를 쓰면 큰돈을 벌수있다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일본으로 떠난다. 신문배달원으로 일본생활이 시작됐다. 신문배달원을 하던중에이원만은 매일신문과 조일신문이 공동으로 실시한 신문확장 표어 모집에 {친절과 노력은 확장의 모}란 작품으로 응모, 일등으로 뽑히기도 했다. 후일 이원만은 이때 경험덕분에 선거구호등을 손쉽게 만들수 있었다고 회상했다.영림서와 알루미늄공장을 거치면서 이원만은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공원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일하는데서 모자생산을 착안한 이원만은 광고모자를 만들기로 결심, 욱(아시히)공예사란 자그마한 공장을 세운다. 처음으로 사업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사원이라야 동생 원천을 포함, 5명에 불과했고 미싱도 여섯대가 고작이었지만 광고모자는 히트였다. 중일전쟁으로 모자수요가 급증하는 바람에 첫 사업은 성공작이었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이원만은 고향에서 일본인 상점의 경리일을 하던 아들 이동찬을 불러 경리일을 맡긴다. 부자간의 협업이 이때부터시작된 셈이다. 이동찬을 지금도 1.5세대 경영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싱대수만도 3천에다 직원이 3천여명에 이르렀을 때였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일본땅에 폭격기가 날자 이원만은 공장마당에 굴을 파서는미싱과 옷감, 피복, 현금등을 숨겨둔다. 이덕에 주위 여러공장들이 잿더미로변했어도 이원만은 재산을 고스란히 건질수 있었다.

**낙선후 다시 도쿄행**

해방이 되자 이원만은 일본공장은 원천에게 맡긴뒤 전재산 180만원(일화)을움켜쥐고 귀국선을 탄다. 종로 진골목에 위치한 서모씨의 대궐같이 넓은집을사고 경북기업주식회사를 설립, 대구와의 인연을 맺는다. 경북기업은 뉴똥생산을 독점, 짭짤한 재미를 본다.

어느정도 돈을 모은 이원만은 한민당에 입당,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영일군갑구로 출마한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들이고서도 낙선,다시 일본으로 향한다.

동경생활중에 이원만은 일본과 한국과의 교역이 늘어날것을 예상, 삼경물산을 설립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거미줄보다 가늘고 철강보다 강하다는 나일론이 인기였다. {전후 일본에서 강해진것은 나일론과 마누라뿐}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형편이었다.

이소베란 일본인의 권유로 이원만은 나일론사의 한국판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나일론사에 생소한 한국의 양말업체나 제직공장을 상대로 한 판매는 쉬운일이 아니었다. 우선 양말을 짤 경우 쭈그러들뿐 펴지지 않는게 문제였다. 양말공장 어디나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석산양말의 최석린씨가 구세주였다.나일론판매를 위해 이원만은 대구 동인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다.기자들도 나일론이 뭔지를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었다. 질긴 실로 짠 양말이나 옷감은 소비량이 적다는 불평에도 불구하고 나일론은 날이 갈수록 인기를더해 나일론은 새롭고 좋다는 의미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화투의 {나일롱뻥}도 이때 생겨났다. 석산양말의 최석린씨나 금강양말의 김덕룡씨는 이원만과 손을 잡고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대량으로 들어온 나일론은 섬유제직업체가 가장 많이 몰려있는 대구.경북지역으로 흘러왔고 생산된 나일론제품은다시 전국으로 흘러갔다.

**공장용수 겨우 확보**

나일론사 수입으로 재미를 본 이원만은 나일론 스트레치사 공장을 세운다.한국나일론주식회사였다. 자리는 수성천변의 뽕밭이 물색됐다. 지난연말 김천으로 이전한 코오롱 대구공장의 탄생이었다. 물이 문제였다. 공장 성질상 풍부한 지하수가 필수였으나 서울의 유명 지질학자조차 물이 나올 땅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다급해진 이원만은 중국인 풍수를 불렀고 다행히 풍수가가리킨 지점마다 물이 쏟아졌다. 이원만은 그때 돈으로 30만환을 사례로 주었다.

한국나일론의 회장에는 이원만, 원천은 사장을, 전무는 이동찬이 맡았다. 코오롱을 이끌 트리오의 등장이었다. 이원만은 다시 필라멘트사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원사를 수입 가공하는 것보다는 필라멘트 원사를 생산하는 것이 수익성도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필라멘트사공장은 혼자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원만은 당시 부흥부장관이던 지역출신 신현확씨를 찾아가 해외개발차관자금을 신청했다.

*신현확장관 큰 도움 해외개발차관자금의 현지조사단 일행이 대구를 들렀을때 경북지사와 대구시장을 비롯 상의회장, 언론사대표등 지역유지들이 마중을나가는등 거시적인 환영행사를 열었으나 조사단은 정치적인 이유로 차관을해줄수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이원만이 야당을 했기 때문에 정부의지불보증을 받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다행히 4.19가 터졌다. 자유당정권의 마지막 부흥부장관이던 신현확은 퇴임직전 극적으로 지불보증에 서명했다. 그것도 신청액보다 40만달러나 많은 액수로 사인해주었다. 오늘의 코오롱이 있게된 결정적인 도움이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지금도 코오롱은 신씨의 고마움을 잊지않는다고 한다.코오롱이 부지매입에 나서자 당시 소유주 경북도는 평당 1천원이던 땅을 평당 3천원으로 제시, 밀고당기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한국 나일론측은 공장부지를 평당 1천원에 팔지않을 경우 공장을 부산동래로 옮기겠다고 발표하기도했다. 마침내 지역 언론들이 공장을 부산으로 뺏길 판이라며 도를 질타, 평당 1천2백원에 거래가 이뤄졌다.

**구미공장건설 "전기"**

필라멘트사 공장에 이어 구미 폴리에스터공장 건설로 코오롱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고향땅에 공단조성을 주저하던 박정희를 설득, 구미공단을 조성토록한 이원만은 공단 초입에 폴리에스터공장을 설립했다. 구미공장을 세운후한국나일론은 대구공장과 구미공장을 합병, 오늘의 코오롱으로 모습을 갖추게된다.

합병이후 몇년뒤 코오롱을 30여년간이나 이끌어 오던 트리오체제는 무너진다.조카와 경영권을 둘러싸고 대립을 보이던 이원천이 독립해 나간 것이다. 이원만은 독립을 선언한 동생에게 필요한 직원은 모두 데려가라며 지원했으나원천은 그후 사업에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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