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30년대에 유럽 화단에 진출했던 5명의 한국화가 배운성 이종우 임용연백남순 나혜석의 당시 현지활동에 대한 자료들이 발견돼 초창기 서양화 1세대들의 해외활동상을 밝혀주고 있다.프랑스 뚤루즈 2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구출신 화가 홍원기씨가{한국 근대회화(1900-1945):서양회화 양식의 한국도입}을 주제로한 박사학위논문 준비과정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홍씨는 이들 한국화가들이 동양정신에서양화풍을 접목한 작품들로 현지 화단의 시선을 끌기도 했으나 대부분 3년미만의 짧은 체류기간으로 인해 제대로 기량을 쌓지 못했고 활동도 빈약했다고분석했다.
홍씨에 따르면 1920-30년대 유럽으로 진출한 화가는 1923년 한국인 최초로독일유학을 떠나 베를린국립미술학교를 졸업, 약 18년간 유럽에서 활동했던배운성(서울, 1901-?),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1925년 파리로 간 이종우(황해도 봉산, 1899-1981), 1922년 도미, 예일대 미대 회화, 조소과 수석졸업후 파리로 갔던 임용연(평남 진남포, 1901-?), 그의 아내이며 한국 두번째의 여류화가 백남순(서울, 1904-?), 세계일주여행중 파리에 8개월간 머물며 작품제작을 했던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수원, 1896-1946)등 5명이다.이중 배운성은 1935년 베를린의 구트리트화랑과 함부르크의 민속미술관,38년파리 샤흐빵띠에화랑 등에서의 개인전 등 가장 활발한 작품활동을 폈다.캔버스와 유화붓 대신 목판에 동양모필을 사용한 독특한 기법으로 {아시아회화와 유럽회화의 개념을 흥미롭게 융화시켰다}는 평을 얻었다. 1927년 살롱도똔느에 목판화 {자화상}이 입선한 뒤 파리로 이주, 38년엔 살롱 도똔느에유화 {한국의 아이} 등 3점, 살롱 드 라 소시에떼 나시오날 데 보자르에 유화{두상}, {화가의 아내} 등 10점을 출품했고, 이중 {화가의 아내}가 캐털로그에 실려있다. 36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당시 세계 최대규모의 목판화전람회인제2회 {세계목판화전}에 {미쯔이 남작과 그의 작품}, {작은 회상}, {어머니와 아이들}, {나비를 보는 즐거움}이 입선했고 이중 {어머니와 아이들}은 캐털로그에 수록됐다. 그는 40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했다.이종우는 파리 유학시절 러시아출신의 사실주의 화가 슈하이예프에게 1년반동안 배웠으며 27년 살롱 도똔느에 당시 야수파의 영향을 입은 {X부인상},{정물}이 입선했으며, 1929년 예일대 졸업후 프랑스로간 임용연은 30년 그랑빨레에서 열린 살롱 드 라 소시에떼 데 악띠스떼 프랑세에 사실화풍의 {인물}이입선됐다.
동경여자미술학교 1년 중퇴후 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작품활동을 했던백남순은 1928년 도불,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와 아카데미 스깡디나브에서수학했다. 30년 살롱 드 라 소시에떼 데 악띠스떼 프랑세에 {누드}입선, 제8회 살롱 데 악띠스떼 뛸르리에 {에르블레 풍경}등 3점을 출품했다. 이들은30년 7월 일시 귀국, 정착했다.
나혜석은 파리근교에 머물며 아카데미 랑송에서 호제 비시에르의 지도를 받으며 야수파 화풍을 적극 수용한 작품제작을 했으나 살롱전 등에는 출품하지않았다.
홍씨는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한국화가들은 배운성을 제외하고는체류기간이 짧아 충분한 기량도 쌓지 못했고 활동도 미미했으나 국내에 다양한 서구현대 회화의 물결을 도입,신선한 자극과 영향력을 미쳤다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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