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치용의 실학자 안정복(안정복)이 삼한정통론(삼한정통론)을 내세워 조선역사의 독자성을 역설한 이래 문화, 예술분야에서도 우리것을 찾는 경향이두드러졌다.이조중기 성리학이 심화되면서 한문학(한문학)에 밀렸던 한글에 대한 중요성이 재인식돼 한글 가사(가사)와 소설문학이 민중의 지지를 얻어 활성화하고 판소리가 새로운 민중문화로 등장하게 된다.
영·정조(영·정조)시대에 두드러진 우리것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이 시기를 이조후기 문예부흥기로 특징지우고 있는데, 이같은 움직임은 집권사대부들의 의지와는 달리 하층계급인 상민 스스로가 자신의 문화영역을 넓혀 나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 시대 민중문화운동의 대두는 임진·병자 양란후 1세기가 지나면서 사회가 어느정도 안정되고 실학사상의 문화계 전반적인 파급 효과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회화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겸재(겸재) 정선(정선 1676-1759)은 당시 중국의 화풍만을 모방하던 분위기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화법(화법)을창안 우리산천의 진경산수(진경산수)를 화폭에 담음으로써 조선화(조선화)의 신기원을 열고 그 전통은 오늘날의 한국화(한국화)에로 이어지고 있다.
겸재는 당시 중국중심의 모화사상(모화사상)에 얽매여 중국풍의 관념산수즉 신선도나 중국의 고사화를 모방해 그리던 화단분위기서 탈피, 우리의 화제(화제)로 구체적인 우리의 산하(산하)를 그렸다.
그의 대표작은 60, 70대 이후의 말년작 '금강산전도'(금강산전도), 서울근교의 풍경을 그린 '인왕제색도'(인왕제색도), '장동팔경'(장동팔경)등의 그림이다.
금강산은 겸재작품의 화제(화제) 가운데서 가장 많이 등장할 뿐 아니라 겸재만큼 금강산을 여러각도서 많이 그린 작가도 드문데 그는 천하제일의 명산금강산을 실제로 답사, 겸재준법이라 일컬어지는 수직집준법(수직 법)으로1만2천봉이 가득한 금강산의 골개미를 유감없이 표현했다.
4계절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금강산은 특히 낙엽이 지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의 개골산이 화가들에게 표현의 충동을 강하게 일으키지만 그방대한 산골을 한 화폭에 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겸재는 독창적인 필묵법으로 이를 완성, 당시 중국풍의 '고원산수화'(고원산수화)에 몰두하던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겸재가 나이 76세때에 그린 '인왕제색도'는 온통 바위로만 구성돼 원근(원근)과 중량·질감을 표현하기 어려웠던 인왕산을 중묵(중묵)의 필법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해 한국 산수화의 정초(정초)를 마련했다.
겸재가 이때 사용한 중묵법은 붓대신 종이나 가죽을 말아서 음영을 표현하는 찰필(찰필)로 중압감을 살리는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필법이었다.
겸재의 새로운 창안인이 중묵법은 그후 '장동필경'의 하나인 '청풍계'등말년의 그림에도 훌륭히 응용돼 당시대 화단의 화제를 모았다.겸재의 소나무묘사법 또한 독창적인 필법으로 종래의 미점(미점)법과는 달리 몇개의 짧은 횡선과 하나의 굵은 사선으로 간략하게 표현, 우리산천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했다.
겸재의 그림에 대한 당대와 후대의 평은 후배 강세황(강세황)은 "겸재는동국(동국)의 진경산수를 가장 뛰어나게 잘 그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화가이며 뛰어난 비평가였던 오세창(오세창·1814~1953)은 "산수화에 스스로 일가를 이뤄 우리나라 산수의 종화(종화)가 되었으며 전해지는 그림도매우 많다"고 했다.
겸재가 우리의 진경산수를 그릴 수 있게 된 것은 화가가 바라본 우리 산천의 시감(시감)을 새로운우리의 화법과 기법으로 표현하려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전 서울대교수 이동주(이동주)씨는 겸재 이전에도 산수화가 있었지만 우리의 진경산수가 될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실제 산천의 시감을 중국산수의 고정된 화법과 기법속에서 표현하려 했기 때문'으로 설명하고 겸재는 이를 극복 한국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격찬했다.
광주 정씨 정시익(정시익)의 2남1녀의 맞아들로 숙종2년 서울 삼청동서 태어난 겸재는 14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향반 출신이면서도 당시 중인이나 상민계급만이 들어가던 도화서(도화서)의 화원이 됐다.
도화서란 원래 관청이나 벼슬아치들의 요구에 따라 국가행사장의 그림이나중국의 명화를 베끼고 모사하는 것이 통상의 작업이었다.
겸재도 처음에는 중국의 그림을 모사하는데 머물수 밖에 없었으나 같이 동문수학했던 문우들과 계속 교우를 가지며 경학(경학)이나 역학(역학)공부에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독특한 표현 역량을 키워나갔다.특히 그는 말년에 역학공부에 몰두했는데 그의 '금강산전도'에는 복희팔괘도(복희팔괘도)의 건곤과 음양의 조화사상이 의식적으로 도입돼 있어 명화가됐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활달하고 파격적인 그림솜씨와는 달리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불편부당했던겸재는 이조시대의 다른 화가에 비해서는 다복한 말년을 살았다.그의 재주와 인간성을 아껴 임금인 영조도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던 그는 경상도 하양, 청하현감을 거쳐 양천현령을 지냈으며 82세때에는 종2품벼슬인 동지충추부사에까지 올랐다.더욱이 겸재가 하양현감으로 재직할때 한동네에 살던 조영복(조영복)과 후배인 유탁기(유탁기)가 잇따라 경상감사로 내려오는 바람에 그들의 비호로영남 65개군·현을 돌며 명승지를 사생한 대작 '영남첩'(영남첩)을 제작하기에 이르렀으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아 화단의 아쉬움이 되고 있다.우리나라 회회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대화가로 화성(화성)의 칭호를 듣기까지 하는 겸재는 영조35년 84세의 나이로 영면, 현재 서울 도봉구 쌍문동인 양주(양주) 계성리(계성리)에 안장됐다.
〈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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