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기획취재 시리즈-청년공작대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불과 21세던 약산 김원봉의 비중이 이같이 커졌다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계가 엄청나게 세대 교체했음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그 사이 20년도 더 흘렀기 때문이었다.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했던 신규식선생은 22년도에 세상을 떠났었다.25년도에는 소련 지역대표적 활동가이자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이번 8·15에야 뒤늦게 서훈된 이동휘선생이 임정을 떠났다. 이승만도 이때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뒤에는 임정과는 거의 단절됐다. 더욱이 이 해에는 박은식선생 조차 별세했다.

27년도에는 김규식-김창숙선생도 떠났다. 김규식선생은파리 종전회의에파견되고 미국에서도 활동했으나 이후에는 중국의 대학들에게 교수생활을 하는데 더 열중했다. 그는 41년도에야 김원봉계열로 복귀해 임정의 연립정부에참가한다. 김창숙선생은 27년 5월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다.28년도에는 박용만선생이 암살돼 버렸다. 그는 미국에서 안창호선생과 함께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으나 임정 설립후 중국으로 건너와 활동하던중 비명에 민족을 떠난 것이다. 그 역시 올해에야 서훈됐다. 이해는 악운이 겹쳐 신재호선생도 체포돼 운동계와 격리됐다. 선생은 그 8년뒤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29년도에는 여운형선생이 체포돼 국내로 격리됐으며 31년도에는 이회영선생이 붙잡혀 옥사했고, 32년도에는 안창호선생이 또 같은 전철을 밟았다.이어 38년도에는 남목청사건으로 현익철선생이 목숨을 잃고, 양기탁선생이순국했다. 그러다 40년도에는 기어이 이동녕선생까지 세상을 떴다.신규식·이동휘·박은식·김창숙·박용만·신채호·안창호·이회영·양기탁·이동녕…국민학생이라도 이름을 금방 알수 있을 우리 독립운동계의 거목들이 중국을 떠난 것이었다.

내일이 광복 50주년이지만, 광복을 5년여 앞두고는 그래서 중국 운동계를거의 김구·김원봉선생이 대표하고 있었다.

그중 김원봉계열이 먼저 군대를 만들었었다. 하지만 39년도 말에는 김구선생의 임정 계열도 군대 창설준비에 들어갔다. 더불어 또하나의 계열을 형성하고 있던 아나키스트들도 독자적으로 군사활동을 펴기 시작했다.그중 아나키스트 청년들이 독자적으로 만든 것이 '한국청년 전지 공작대'였다. 당시 중국군 헌병대위로 근무중이던 나월환이 대장이 돼 상해시대부터 뜻이 맞았던 동료들이 중경에서 다시뭉쳐 28명규모의 공작대를 만들어전선으로 향했던 것이다.

39년11월 창설한 공작대는 전선 경계이던 황하 강변의 서안으로 이동, 본부를 설치한뒤 강을 넘어 적 후방으로 침투해 활동했다. 이들은 중국군 34집단군과 연계, 중국군 태항산 유격대에 배속돼 한국인이 6천명에 이르던 부근을 무대로 작전했다. 그러면서 동포 청년들도 포섭했다. 모아진 인력은 서안으로 보내 중국군 간부훈련단에 특별히 만들어진 '한국청년훈련반'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결과 40년도 말에는 병력이 1백여명으로 증가하는 성과를 보였다.

이같이 활동이 뛰어나자 앞서 창설된 김원봉 계열의 조선의용대와 뒤이어출범한 임정측 광복군이서로 이 전지공작대를 자기들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노력했다. 그러다 전지공작대는 42년1월1일자로 광복군 5지대로 편입된다.광복군 쪽이 이긴 것일 터였다.

그러나 광복군으로서의 공작대는 43년8월 이후에 상당수 대원이 체포되거나 전투 중 순국하는등 비장한 일들을 잇따라 맞았다. 건국대 총장과 독립기념관 이사장을 지낸 조일문선생은 그의 글에서 이 공작대의 행로를 독립운동행적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비극의 시발은 광복군 편입 직후이던 42년3월 대장 나월환이 부하들에 의해 피살된 것이었다. 43년8월에는 대원 김성률-이한기-문학준이 접전 중 전사했다. 9월에도 김유신-김운백-정상섭-안일용이 전투중 순국했다. 44년3월에는 지하공작원 3명이 일본군에 검거돼 총살됐다. 태항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다른 4명도 붙잡혀 일본 감옥에 갔다. 광복이후이던 45년8월17일에도 3명이 총살됐다.

이들이 적후방으로 잠입하는 출발점이었던 황하 강변의 서안은 그 뒤에도우리 광복군의 최전방 기지로서 광복 때까지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서안을 그러한 인연으로 바라보는 우리 국민은 많지 않다. 그보다는 아주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취재팀을 안내한 교포가이더는 작년 현재 이곳을 찾는 한국인이 하루 50여명은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런데도그 숱한 우리 독립운동의 현장을 보겠다고요구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로인해가이더 자신 조차도 그런인연이 있었는지, 어디가 유적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취재팀으로부터 오히려가이드 받아가며 메모를 할 지경이었다.

그 많은 관광객이 피땀 흘려 번 달러를 쓰겠다고 기어이 이곳까지 찾는 것은 서안이 '장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옛 당나라-진(진)나라 수도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시왕릉과 병마용이 유명하고 비림(비림)-양귀비궁(화청지, 장개석 서안사변지)이 관심을 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서안은 옛 실크로드의 시발점이기도 하고, 황사현상의 시원지이기도 하다. 서안이 성도인 인구 3천4백만의 섬서성 북부에 있는 황토고원이 황사 발생지라는 것이다. 일대는 연중 강우량이 6백40㎜에 불과해 밭농사가 주를 이루고, 따라서 국수가 주식인 곳이다. 그런만큼 36가지 만두가 있다고할 만큼 분식이 발달하기도 했다. 황사가 발달할 수 있는 것도 이같은 건조한 날씨 때문일 터이다.

인구 3백만의 성도 서안에는 당나라 때 성(성)이 15㎞가량 남아 있어 그것이 시내지역을 구획 짓고 있었다. 남쪽은 종남북이 둘러져 있었다. 이 산은우리 고전문학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유서 깊은 상징처가 되고 있기도 하다.서안에서는 또 위(위)라는 강이 흘러 황하로 연결되는데, 이 위하는 강태공이 낚시하던 곳이라 해서 강태공기념관이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이렇게 찬란한 서안에서 청년전지공작대가 본부를 마련한 곳은 연호구(연호구) 이부가(이부가) 29호였다. 이곳은 앞서 말한 당나라 때 성곽 안쪽의시가 중심이었고 서안의 남북 간선도로인 북대가(북대가)에서 서쪽으로 바로연결된 곳이었다. 현재 서안시법원(중급 인민법원)이 자리한 곳이 그곳이라는 것이다.

이 터는 또 나중에 광복군이 창설돼 사령부가 자리잡는 곳과도 50여m 밖에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에 앞서 광복군 준비단 성격의 임정 군사특파단이 자리했던 곳과도 1백여m 거리였다. 아마도 당시엔 시가 중심지인데다 건물도여분이 있어서 일대가 우리 독립군의 근거지가 된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여기를 본부 삼은 대원들은 우선 서북대학 구내에 설치됐던 중국34집단군간부훈련단에 들어가 3개월 훈련을 받았다. 지금독자들이 쉽게 알수 있는인사 중에는 이재현지사 같은 분이 이곳에서 이때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이들은 3개월 뒤 중국군 소위로 임용돼 적 후방인 태항산등으로 배치됐었다.서북대학 역시 서안 시내에 있었다. 이 학교는 만주 군벌 장작림의 아들이자 서안사변 주동자였던장학량이 만주를 일본군에 뺏기고 이곳으로 옮겨와세운 것이었다. 만주 심양에 있던 동북대학을 이전해 자신을 교장으로 해서개교했다는 것이다.

항일 간성들을 키워냈음을 증언이라도 하듯, 교정 비석에는 '인재를 길러산하를 회복키 바란다'는 글귀가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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