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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패트롤-고 류인수공 행적비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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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탄압에 항거,서슬퍼런 일경의 총칼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2년의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가 73년만에 정부로부터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그 행적비가 세워지게 됐다.'창리 독립만세사건'의 주동자로 뒤늦게 밝혀진 고 유인수 공(1886년생·경남 합천군 대병면 창리 463)의 행적비제막식이 고인이 가신지 49년만인19일 경남 합천군 용주면 내가리 용문정에서 거행됐다.

유씨는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의 인산일에 참가하고 돌아오면서 독립선언서를 숨겨와 역평리에서 비밀리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한 뒤 각마을을 돌며 군중동원공작을 폈다.

대병면소재지 창리장날인 3월20일을 기해 유씨는 동지 권영두·권중업·임상종씨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선창, 순식간에 4천여명의 군중들이 운집해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이때 일경 수십명이 출동,무차별로 총을 난사하고 칼을 휘둘러 수백명이다치고 54명이 합천경찰서에 투옥되었다.

주동자급으로 분류된 유씨는 경찰서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수개월간 고초를 겪다 부산지법 진주지청으로 이송돼 1심에서 보안법위반죄로 징역2년을선고받고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됐다.

유씨은 만기출소후에도 고문과 옥고후유증으로 고생하다 62세를 일기로1947년11월 15일 별세했다.

1919년 6월 작성된 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보고에도 '특히 창리에 있어서의 소요는 가장 난폭 낭자를 극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서류등을 소훼하여본도 소요중 함안·군북의 소요와 더불어 격렬 흉포한 소요이다'고 기록하고있다.

유씨의 장남인 해창씨(71)등 후손은 할아버지대에까지 중농으로 살다가 가장인 아버지의 옥바라지와 출소뒤 후유증으로 가세가 기울어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부친의 독립운동자료를 찾지 못하다 지난 91년 8월 부산 동래구사직동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에서 당시 유씨의 판결문을 찾아냈다.보훈처도 이 판결문을토대로 독립운동사 관계자료에서 유씨의 공적을 확인하고 92년3월1일 대통령표창 건국훈장 애족장(2799호)을 추서하고 후손에게 국가유공자증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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