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한민국 수립 50년 한국인 새 도약을 향해

한 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정치체제의 건전성과 경제적 풍요 못지않게 평범한 원칙과사회적 합의를 존중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뒷받침돼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50년동안 우리사회는 청산하지 못한 일제의 잔재와 왜곡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갈지자 걸음을 해왔지만 그 틈바구니에서도 시민의식은 꾸준히 성장해왔다.

그러나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도 우리 의식속에는 지역감정과 연고주의, 결과지상주의, 권위 의존성 등 낡은 세기의 유령들이 엄연히 자리를 잡고 있고 현실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시민의 자율적 영역을 확대하고 국가 의사결정 구조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위해서는 낡은 의식의 장애물들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한국사회 최악의 허위의식은 지역감정이다. 이는 국민적 에너지를 지역갈등과 반목에 소모시키고 인재 등용의 차별 등 불합리와 비효율을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

고려대 최장집교수(정치)는 동료 학자, 언론인과 공동 집필한 '지역감정연구'라는 책에서"지역감정은 반공주의와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핵심 이데올로기만으로 한계를 느낀 집권세력이 새롭게 동원한 우리 사회의 가장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라고 정의했다.'영남정권'의 시대가 가고 호남출신 대통령이 집권했지만 6.4지방선거와 7월의 국회의원재.보궐 선거 결과는 지역감정이 정권교체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지역감정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돼 수십년동안 정치체제와 계급구조를 결정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 군림하며 정치적 목적에 이용돼왔다는 점에서 태생은 정치적이지만 국민들 스스로 세대를 이어가며 대물림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이미 자생력을 가진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부 언론은 영남정권 시절에는 반호남 감정을 부추기다 정권이 교체된 후에는 영남인들의 박탈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지역감정을 증폭시키고 수명을 연장시키려 하고 있다.이 때문에 지역감정은 정치적 변화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며 지식인들의 감시와 질타, 언론의 자성, 시민 스스로 편견의 벽을 깨뜨리려는 노력이 함께 이뤄질 때 조금씩 해소될 수있다.

우리 국민을 사로잡고 있는 비합리적인 의식이 바로 안면과 학연을 따지는 연고주의이다.사소한 동사무소 민원 처리에서부터 금융기관의 대출관행, 중요한 정책결정에 이르기까지연고주의가 영향을 미친다.

연고주의는 소(小)공동체의 유대감을 활성화시키는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정도를 지나쳐 법치주의와 기회의 평등이라는 시민사회의 기본질서를 흔들고 냉엄한계산과 원칙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 대한 적응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지역감정, 연고주의와 함께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한 요인은 절차의 정당성을 무시한 '결과 지상주의'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법은 지키는 쪽이 손해' '이기면 충신 지면역적' 등의 말들은 우리 국민들의 의식속에 자리잡은 '결과 지상주의'와 피해의식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제하에서 동족을 억압해 영화를 누린 친일인사가 해방후에도 득세하고 시민을 학살한 군인이 대통령이 되며 부동산투기 등 갖은 탈법으로 돈을 벌어도 버젓이 법망을 피해가는 현실에서 국민들은 어두운 교훈을 배웠다. 한 계단씩 오르기 보다는 승강기를 타고 곧장 꼭대기로 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풍조가 팽배해있다.

한림대 이재혁교수(사회학)의 지적대로 "제도, 규범에 대한 공적신뢰가 무너지면서 인맥,파벌 등 사적신뢰에 기대는" 악순환이 빚어진 것이다.

여기에 지난 30년간 양적팽창에만 주력한 고도성장의 환상은 어떻게든 '빨리 빨리' 실적만 올리면 된다는 적당주의, 편의주의를 낳았고 절차의 적법성이나 정당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작게는 월드컵 축구대표팀의 참패로부터 삼풍백화점 참사,대형 금융비리와 기업부실, IMF사태 등은 기초를 무시한 '결과 지상주의'의 소산이다.

이런 점에서 '성공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두 전직대통령과 각종 인사와 이권에 개입한대통령의 아들이 법의 심판을 받은 사건은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망신일지모르지만 우리 국민들이 정당한 절차와 법질서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한편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곧 권위주의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해 국가와 사회 운영의 책임있는 주체가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요즘 '박정희 신드롬'으로 통칭되는 '독재적 리더십'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학자들은 국가부도 직전의 사태가 빚어진 한 원인을 바로 국가경영이 정부 주도의 경직된틀에만 맡겨지고 시민의 견제와 참여가 보장되지 않아 유연성을 잃은 데서 찾고 있다.경제가 어려울수록 새로운 독재적 리더십을 기대하기 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세기에서 바람직한 국가운영의 패러다임은 정부가 제시하는 정책방향을 시민이 직접검증하고 시민의 자율적 합의로 선택된 방향을 정부가 실행하고 지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이같은 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급증을 버리고 우리 안에있는 낡은 의식들을 하나씩 떨쳐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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