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날에도 어김없이 민족의 대이동 사태가 일어났다.
이때가 되면 곧잘 필자에게 설날의 유래와 과정을 물어온다. 일제시대 설날이 되면 순사들이 눈을 번득이며 조선인 관리들의 집을 감시하였다.
양력설날을 지내고 음력설날을 지내지 못하게 막으려는 총독부 정책에 따라 이를 시행케 하려는 짓이었다. 조선인 관리들은 조심스럽게 바깥의 동정을 살피면서 차례를 지냈다.
어떤 관리들 집에서는 양력설에 차례를 지내는 척 너스레를 떨고 정작 음력설에 눈치를 살피면서 차례를 지내기도 하였다. 관리들이 이를 어기면 문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순사들이나 면서기들이 양력설을 지내라고 당부를 해도 일반 여염집에서는 양반이나 상인 출신을 가릴것 없이 음력설을 지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온 식구가 모여서 제야를 지내고 큰 집 작은 집을 돌며 차례를 지내고 윷놀이 널뛰기 놀이를 벌였다. 이런 신정행사와 놀이 문화는 수천년을 이어온 전통이었고 세시(歲時)풍속이었다.
만약 양력설을 지내는 집이 있으면 손가락질을 하며 지탄하였고 비웃었다. 때로는 친일파라고 매도까지 하였다. 총독부 관리들이 마지못해 양력설을 지내면서도 쉬쉬하면서 숨기려 들었다.
그리고 양력설은 왜놈설, 음력설은 조선설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양력설은 태양력에 기초한 신정(新正)인데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설정하였다.
음력설은 달이 지구를 한번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음력설을 구정, 양력설을 신정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일제시기 음력설을 '옛 설'이라고 하여 구정이라 부르게 하였고 양력설을 '새 설'이라고하여 신정이라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이 용어도 일제의 잔재이다.
한편 양력설을 일제만이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대한제국도 서양식 근대 제도에 도입하면서 태양력을 공식으로 사용하고 양력설을 지내라고 공표하였다. 이때에도 거의 호응하지 않았다.
이는 오랜 관습이 작용한 탓이나 일제가 강요할 때에는 우리의 풍속을 말살하려는 식민지 정책에서 나왔다고 하여 더욱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하지 못하는 민중들은 양력설을 강요하는 정책이나마도 반대하여 민족정신을 드러내려 하였다.
아무튼 민족해방이 된 뒤에도 정부공식으로는 양력설을 지정하였으나 국민들은 거의 따라주지 않았고 도리어 양력설을 공무원설이라고 비아냥 거렸다.
그리고 음력설이 되면 한사코 말리는데도 고향을 떠나 살던 사람들이 온 가족을 데리고 극심한 교통혼잡을 뚫고 기차를 타거나 승용차를 몰고 귀향길에 나섰다.
더욱이 산업체에서는 이런 현실에 맞추어 귀성차를 동원하면서까지 근로자들을 고향에 보내주었다.
역대정부에서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고치려하지 않았다. 독재정권들이 국민의 오랜 관습과 역사적 배경에서 우러나온 의식을 외면한 탓이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 음력설을 '민속절' 따위 헷갈리는 이름을 붙이려한 적도 있었다. 끝내 그 정당한 이름인 '설날'을 찾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진정 국민들이 백여년동안 버티며 찾은 설이었다.
작지만 빛나는 승리였다. 현대에 양력을 사용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로 당연하다. 그러나 설날은 이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농경사회의 뿌리깊은 우리의 전통이었다.
산업사회라고 하여 이런 전통이 무시되어서는 바른 민족정신을 지켜낼 수가 없을 것이다. 설은 조상을 추모하고 부모와 자식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가족애를 돈독하게 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함양하는 날이다.
교통혼잡도 있으니 서로 편리한 대로 농촌에 사는 부모가 도시에 사는 자식들을 찾아오는 경우도 장려해볼만 할 일이다.
〈역사학자〉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