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 54돌…용정 항일독립운동 재조명

중국 용정(龍井)은 북간도 항일독립투쟁의 본거지였다. 민족교육의 터전이었던 이상설 선생의 서전서숙과 김약연 선생의 명동학교가 자리한 곳이요, 3만여명의 동포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른 역사의 현장이자 일제의 철도부설 자금 15만원을 탈취해 낸 쾌거의 장이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태어나 자유와 정의에 대한 불굴의 저항정신을 길렀고, 그처럼 갈망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젊은 넋을 묻은 곳이기도 하다. 항일 무장독립투쟁사에 찬란히 빛나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도 용정에서 멀지않은 협곡에서 벌어졌다.

북한땅 회령에서 두만강 건너 용정까지는 불과 100리 길이다. 선구자들이 지친 가솔들을 이끌고 험준한 오랑캐령을 허위허위 넘어왔을 한서린 그 길. 용정에 가면 왜 그곳에 숱한 민족선각자들과 독립지사들이 망명해 와 국권회복의 초석을 다졌는지 알만하다.

용정은 '선구자'의 고향이다. 용정시내 서남쪽에 위치한 비암산(琵岩山) 암벽위 일송정(一松亭) 아래로 해란강이 흐르고, 용두레 우물가와 용문교에서 바라보는 달빛이 지금도 곱기만 하다.

가곡 선구자는 원래 '용정의 노래'였다. '선구자'란 제목은 작곡자 조두남이 해방후 바꾼 것이라고 한다. 또 1933년경 북만주를 방랑하던 조두남이 윤해영에게 가사를 건네 받았지만, 용정을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는 2·3절 가사를 일부 고쳐 당시 용정의 참모습을 담지 못했다는 게 현지 동포들의 얘기다.

'눈물 젖은 보따리'·'흘러흘러온 신세' 등의 구절을 빼버리고 '활을 쏘던 선구자' 등으로 고쳤는데, 용정개척 초창기까지 올라간다 해도 이미 총으로 무장한 시대라 활을 쏘던 선구자는 없었다는 주장이다.

하여간 가곡 선구자는 용정의 경관과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상설 선생과 같이 경륜과 의기가 드높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친 꿈을 펼치던 곳, 그러나 일제가 판을 치는 땅이 되어 버렸던 용정의 변천사가 처연한 탄식으로 녹아 흐른다.

선구자의 첫 구절에 등장하는 일송정도 영욕의 역사를 따라 모습이 많이 변했다. 항일 의지의 상징이었던 '일송정 푸른 솔'을 1938년 일제가 뿌리 채 없애 버린 후, 90년대에 이르러서야 그곳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한그루를 새로 심은 뒤 기념비를 세웠다.

정자와 기념비 조성도 경남 거제시에서 조경업을 하는 윤종환씨가 기증한 것으로 적혀 있는데, 최근들어 백두산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자 중국 정부 의 시선이 곱지 않다고 장원준(57) 용정시 교육위 주임이 전한다.

용정 민족운동사의 한 장을 영광스럽게 장식한 최고의 거사는 역시 '3·13 독립만세운동'이다.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접한 연길·화룡·용정 등 북간도의 3만여 반일군중과 학생들이 용정촌 서전대야로 구름처럼 몰려들어 '독립만세' 소리가 북간도를 뒤흔들었다.

연변대학 역사학과 박창욱 교수는 "3·13 반일시위운동은 간도땅 백의동포들이 일으킨 전례없는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투쟁의 물결이 만주전역으로 파급되었다"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등 반일무장투쟁도 바로 3·13 운동의 연장이며 진전"이라고 평가 한다.

당시 일경의 발포로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용정의 문학가들은 '용정의 거리가 피로 물들고, 해란강도 목메어 울었다'고 그날의 아픔을 적고 있다. 이때 희생된 열사 중 13인의 유해가 용정 동남쪽 교외 허청리의 둔덕에 함께 안장됐는데, 바로 용정의 3·13 기념사업회가 최근 발굴·복원한 '3·13 반일 의사릉'이다.

3·13 반일시위에 이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장거가 소위 '15만원 탈취 사건'. 1919년 12월30일 일제가 조선은행 회령지행에서 길회선 부설자금 15만원을 용정의 간도 일본총영사관으로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한 용정 철혈광복단은 6명의 청년들로 결사대를 조직했다.

용정 인근인 동량어구 재바위골 버들방천에 매복해 있던 결사대는 자금운송 마바리를 호위하던 무장 일경 6명을 순식간에 사살하고 3마대에 이르는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해 바람처럼 사라졌다. 당시 15만원이면 체코제 소총 15만정을 살수 있는 거액이었다.

비록 이 돈으로 독립군을 무장시키는데는 실패했지만 결사대 중 최봉설·박웅세·김준 등이 홍범도 장군 부대에 합류하는 등 북간도의 무장독립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쾌거였다.

용정시 용문가에 있는 용정중학교는 간도의 민족계몽과 문화교육의 발상지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과 역사에 부끄럼이 없이 몸과 마음을 단장하여 참되고 슬기롭게 살도록 이끈다'는 건학 정신이 지금껏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용정중학 교정 오른편에 새로 단장된 대성중학교 건물 입구에 선 윤동주 시비는 용정에 남은 항일 저항정신의 또하나의 표상이다.

건물 2층에 들어선 역사전시관을 찾으면 숙연하게 펼쳐지는 우리 민족의 간도 개척사와 문화교육의 발자취·반일민족독립의 역사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윤동주 전시관의 해설원 이영옥씨는 "최근 들어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 중 일부러 용정에 들러 역사관을 둘러보고 가는 동포들이 많다"고 전한다.

용정의 독립운동사 복원 현장 취재를 마치고 북만주 벌판을 뒤로 한채 귀국길에 오르면서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명동촌의 한 교회터에 세운 기념비의 비문을 새삼 떠올려 본다. 잃어버린 만주벌과 아직도 반쪽으로 남은 조국 광복 54주년을 되새기면서….

'금수강산 찾고저, 이역의 거친 땅에서 온갖 풍상고초를 다 겪으며 헌신한 무명투사 그 얼마이던가. 속절없이 사라진 하얀 이슬과 이슬…. 겨레의 한 가슴에 별처럼 돋아나 영원토록 빛뿌려가리!'

글:趙珦來기자

사진:閔祥訓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