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슨 타이드'란 영화가 있다. 미국 핵잠수함 내의 핵 미사일 발사를 둘러싼 권력투쟁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잘못된 명령이라도 따라야 한다'는 함장(진 핵크만)과 '잘못된 명령은 따를 수 없다'는 부함장(덴젤 워싱턴)의 팽팽한 갈등구조로 전개된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반란으로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명령에 대해 그것이 타당하고 합리적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금기였다. 명령에 저항하고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탄압받아 왔다. 그것이 비록 잘못된 명령일지라도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비판과 고발보다는 맹목적인 희생을 강요당해 왔으며, 그것이 정의인양 길들여져 왔다. 이런 점에서 영화에서 보여준 갈등구조는 군이라는 특수상황을 감안할 때 파격적이었다.긴박하게 전개되던 권력투쟁은 부함장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미 해군본부에서 진행된 사건조사위원회에서 위원장은 "잘못이 함장에게 있지만 그것을 시정하는 방법은 잘못됐다"면서 부함장을 나무란다. 영화는 '잘못된 명령엔 따를 수 없다'는 입장에 무게중심을 실어주는 듯 했으나 결국'함장도 잘못했지만 부함장도 잘한 것 없다 '는 양비론적 입장을 택한다.
영화에서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복종과 반역이었다. 그리고는 둘 다 비판해 버린다. 무엇이 정의였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누가 전적으로 옳았다고 말하기는 싫다. 부함장이 승리했지만 그것은 영화가 내린 작위적인 해석일 따름이다. 만약 함장의 생각이 옳았다고 설정을 했다면 부함장은 반란죄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의는 결과로 평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의 기준은 그 대상이 정한다. 권력에 아첨하고 부도덕한 지배자에게 충성스럽게 복종하는 자가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부정한 돈, 검은 돈 가릴 것 없이 긁어모아 남 한번 도울 줄 모르는 천박한 자본에 복종하는 이, 역시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역적으로 간다한들 반역을 택하겠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도덕적 촉각을 예민하게 세워 소외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누군가가 이들을 짓밟고 착취한다면 주저없이 반역의 칼을 드는 것이 정의다.
영화를 본지도 이제 4년이 지났다. 우리는 과연 누구에게 복종하며 살고 있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과 자본에 복종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모를 일이다.
선명요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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