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역사가 남겨준 교훈조차 제대로 새기지 못했다.
역사에 무지했거나 역사를 우롱한 가장 대표적인 보기로 최근 건설교통부가 시행에 들어간 건축실명제를 들 수 있다.
건축실명제란 기술자에서 감독공무원까지 공사에 관여한 모든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밝힘으로써 부실시공을 막고 책임시공을 이루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 조상들은 이미 1천500년전인 삼국시대에도 이미 건축실명제를, 정확히는 토목실명제를 아주 완벽하게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경주 지역에서 현재까지 9개가 발견된 신라 남산신성비와 3개가 나온 고구려시대 평양성돌.
그런데 여기에는 신라인과 고구려인들이 직접 새긴 기록이 남아있다. 그 내용은 누가 공사에 관여했으며 이들이 담당한 공사구간이 얼마이며 하는 기록이다 .
신라 진평왕 13년인 서기 591년에 작성된 남산신성비에는 만약 3년안에 성벽이 무너지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문까지 담고있다.
최근 시행에 들어간 건축실명제보다 오히려 신라가 더욱 철저한 건축실명제를 실시했음을 여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진평왕은 재위 13년째인 신해년(辛亥年), 즉 서기 591년 지금의 경주 남산신성을 축조하기 위해 전국에 인력 동원령을 내린다. 이 성을 쌓는데 얼마가 동원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네별로 일정구간씩 공사가 배정된다.
맡은 구간이 완공되고 나서 신라인들은 큰 돌, 즉 비석에다 글자를 새겨 다음과 같은 기록은 남긴다.
"신해년(591년) 3월26일 남산신성을 축조하매 법에 따라 쌓았다. 이후 3년안에(이 성벽이) 무너져내린다면 죄를 받을 것임을 명령으로써 서약하노라. 이 공사를 담당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이런 건축실명제 정신은 고구려라고 별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의 평양 근처에는 고구려인들이 평양성을 쌓으면서 기록을 남긴 성돌이 지금까지 3개가 발견됐는데 아마도 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내용이나 양식은 3개가 대단히 비슷한데 1766년에 출토돼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가 판독한 성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축년 5월21일 여기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1리(里)는 물성(物省)이란 관청 소속의 소형(小兄)이란 벼슬을 가진 배백두(俳百頭)라는 사람이 쌓았다"
이런 건축실명제 정신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조선 후기 정조가 신도시로 구상한 수원 화성(華城)을 쌓으면서는 그 절정에 달한다. 당시 정조는 화성의 공사과정을 '화성의궤'(華城儀軌)라는 기록으로 남기는데 여기에는 공사설계도는 물론이고 공사에 동원된 인부 이름까지 일일이 거론되고 있다.
이런 철두철미한 기록정신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는 "토목실명제를 구상한 우리 역사와 조상들의 교훈만 제대로 알았어도 부실공사는 지금보다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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