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해만 지면 자는 곳

며칠 전 내가 일하는 병원의 원보에 담을 이야기를 찾아 길을 나섰다. 이름하여 의료취약마을을 찾아 봉화로 가는 길이었다. 그날은 용케도 봉화군 재산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배로부터 전기도 들어가지 않는 곳을 소개받고 쉬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다.

춘양에서 영양으로 난 31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골짜기로 슬쩍 숨어든 길로 들어섰다. 얼어붙은 개울가에는 벌써 버들강아지가 피어 있었다. 한참을 인적도 없는 황톳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는 정말이지 전신주가 보이지 않았다. 숨이 턱에 찰쯤 해서 달랑 집 두 채가 얹혀 있었다. 갈산 2리, 이름하여 보냇골이라는 곳이었다.

아랫집에는 늙은 내외가 살고 윗집에는 50대 중반의 부부가 산다. 마침 마당 설거지를 하고 있는 윗집 부부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겨울이고 또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논과 밭은 비어 있었다. 산 중의 짧은 겨울 해를 의식해서 그런지 오후 4시정도인데 벌써 군불이 발갛게 달아 있었다. 하늘만 빤한 산골마을이 장작 타는 냄새로 덮여 있었고 쇠죽솥에서는 구수한 짚냄새가 피어올랐다.

얼마전까지는 호롱불을 밝혀서인지 부엌벽에는 호롱창이 있었다. 지금은 초와 가스 등으로 가까스로 어둠을 사른다. 개울물을 그대로 길어다 먹는 청정한 곳이지만 밤은 칠흑이리라. 바람벽에는 장작이 켜켜이 쌓여 있고 처마 밑에는 찰옥수수가 치마를 걷어붙인 채 말라가고 있었다.

부부는 한없이 푸근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마침 낮에 아랫집 개가 물어 죽인 장닭을 잡아 고았다며 내왔다. 개가 밉지도 않은지 노부부의 몫을 덜어두었다. 침침한 부엌방에서 산골부부의 인심에 젖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어둠에 쫓겨 자리를 털고 휘황한 도시로 내려왔다. 생각같아서는 한며칠 머물고 싶었다.

그랬다. 부부는 전기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객의 물음을 한 마디로 자르며 웃었다. "해만 지면 자지요"

안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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