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경렬 세상읽기(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버스를 타고 직장 근처에 있는 아파트 단지를 지날 때 현수막 하나나 눈에 띄었다. 그 현수막은 "주민의 생사가 걸린 도로 죽어도 이대로 개통할 수는 없다"라는 선언적 문구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아파트 근처에는 아직 개통되지 않은 도로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무슨 사연 때문에 도로를 개통할 수 없다는 말일까. 도로가 개통되면 오히려 주민들의 생활 여건이 나아지 않을까. 이런 의문과 함께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생사 걸린'이라든가 '죽어도'와 같은 격한 표현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 도로가 주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일까. 죽어도 개통할 수 없다니, 그 도로가 개통되면 주민들은 과연 죽음을 무릅쓸까. 개통되어 자동차들이 달리는 도로 변에서 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모습을 떠올리다가, 나는 어처구니없는 나의 상상에 혼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생사가 걸린'이라든가 '죽어도'라는 표현이 모두 비장한 결의를 담기 위한 수사적 빈말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배고파 죽겠다'라든가 '필사적으로 반대한다'라는 표현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종종 죽음과 관계되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사람들은 이를 종종 '애교로' 받아넘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죽음과 관계되는 표현을 별다른 생각없이 사용하지만, 그들이 그런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정말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 표현이 단순히 수사적인 빈말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점심 때 식당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종업원이 종이로 포장한 수저를 가져다 주었는데, 그 수저는 설거지가 되다 만 것이었다. 종업원을 불러 불평을 하려는 순간 수저를 포장했던 종이에 씌어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정성껏 모시겠다는 것이 겨우 이 정도인가. 세상에! 이런 식으로 빈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빈말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수저를 포장했던 종이에는 바로 그 말 이외에도 '고급 위생 포장'이라는 말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고급 위생 포장'이라니. 정성껏 모시겠다는 말보다 나를 더 불쾌하게 한 것은 바로 이 '고급 위생 포장'이라는 말이었다.

따지고 보면 결코 애교로 받아줄 수 없는 빈말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가짜가 많기에 '진짜 참기름'이라는 말도 모자라서 '진짜로 진짜 참기름'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한 지역에서 같은 종류의 음식을 팔면서 '진짜 원조'를 내세우는 식당이 왜 그리도 많은지.

그러나 이런 정도의 표현쯤이야 요즈음 정치권에서 나오는 빈말들에 비하면 애교로 봐 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가 '신당이 실패하면 모두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라고 했다던가. 신당이 실패하면 그렇게 말한 사람이 정말로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을까. 물론 누구도 그러리라고 예상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빈말을 했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려 하다가도 영 개운치 않은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종류의 빈말은 단순히 빈말이 아니라 의미가 가득 찬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또는 그 말이 설사 빈말이라고 해도 빈말을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하는 빈말이기 때문이다.

절박감과 비장감을 담은 이런 식의 빈말들로 가득 찬 세상을 사노라면, 언어 순화 운동이라도 한판 벌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 그런 식의 빈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라도 제정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심지어 애교로 봐 줄 수 있는 빈말까지도 너그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에. 이 같은 나의 넋두리가 빈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빈말이 아닐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