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4월 안개호텔(78)-그 여자의 정체(18)

시험용 쥐처럼 유리관속에 갇혀버린 느낌이다. 어느 쪽부터 가봐야 하는 걸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감기약부터 먹었다. 이하정. 집으로 돌아와서야 그녀의 이름이 뇌리에 떠올랐다. 이미 십년전의 일이었지만 모든 것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헤어진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잊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가 나를 잊었을때의 얘기다. 오늘에야 그걸 알게 됐다.

나는 잠을 잃어버린채 어둠 속에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시간은 뚜벅뚜벅 군홧발소리를 내며 귓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어제까지 머물던 그 시간 밖으로 외롭게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스탠드를 켜고 묵은 사진첩 속에서 마른 꽃잎처럼 단 한장 남아 있는 그녀의 사진을 찾아냈다.

그것은 주민등록증에 쓰이는 작은 명함판 사진이었다.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녀에게서 사진을 받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마 두번이나 세번째 만났을 때였겠지. 상대에 대한 서먹함이 겨우 가시고 나서 자신에 관한 것을 하나씩 꺼내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흔히 여자들이 수첩에 끼워놓고 다니는 어머니나 여고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다 주민등록증을 갱신하기 위해 마침 찍어놓았던 여분의 것을 한장 내게 주었을 것이다.

스물세살때 그녀의 모습은 아직 울타리 밖으로 나와 보지 못한 토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장이나 멋내기가 서툴렀고 수줍은 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또래의 다른 여자들에 비해서도 그녀는 순진한 편이었다. 무얼 더 알고 싶어하기보다 그때까지 자신이 경험한 둘레 안에서 안전하게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던 여자였다.그녀와의 결혼이 불가능했다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남자 나이 스물셋은 여러모로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이른때다. 당시에 나는 방위 제대를 하고 복학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가정을 꾸려나갈 책임 능력이 없을 때였다. 집안 사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중학교 수학교사로 지방에서 혼자 하숙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시골 노모에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고모의 대학 뒷바라지까지 맡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 나이에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또한 스물네 살에 갓난아이의 아버지가 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이유가 가장 컸다. 그 나이엔 앞으로의 가능성에 더 이끌리는 법이고 여자에 국한된 얘기라 하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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