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북중미 월드컵 A조에서 대한민국이 전개해야 할 이야기를 승점표로만 따지면 꽤 단순해진다. 체코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승점을 따고, 개최국 멕시코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최소한 버티고,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과의 세 번째 경기에서 승점을 얻으며 다음 라운드인 32강 토너먼트를 안정감 있게 준비하는 지혜도 발휘해야 한다.
그런데 지도를 펼치면 이야기는 좀 더 확장된다. 멕시코는 한국의 오래된 축구 대결 상대이자 한국 월드컵사의 출발점이다. 멕시코는 북중미 최강권의 축구 강국이지만 월드컵 우승 후보군으로 분류되는 절대 강호는 아니기에, 한국이 종종 어깨를 견주는 승부를 만들기도 했다. 체코는 비교적 적은 조우 속에서도 한국 축구의 유럽 경쟁력 대련 상대라는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이번엔 연습이 아닌 실전이다. 남아공은 대표팀 자체는 낯설지만 한국 축구의 첫 원정 16강 기억을 품은 지명이라 의미 부여를 할 만한 상대다.
◆멕시코의 두 얼굴
멕시코는 한국 월드컵사에서 너무나 익숙한 상대다. 이번에 조별리그에서 맞붙으면 월드컵 본선에서만 세 번째 조우가 된다. 벨기에, 독일, 스페인, 우루과이와 함께 한국의 월드컵 최다 대결 상대 그룹에 들어가는 셈이다.
월드컵을 포함한 A매치 전적은 한국이 열세다. 2025년 평가전 2대2 무승부까지 포함해 4승 3무 8패를 기록했다. 자주 만났고, 때로는 좋은 장면도 만들었지만, 객관적 지표는 멕시코의 우세를 가리킨다.
첫 기억은 의외로 찬란하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은 멕시코를 5대3으로 꺾었다. 해방 후 국제무대에 나선 한국 축구가 세계에 이름을 알린 초기 장면이다. 멕시코와의 인연은 이렇게 승리로 시작됐지만, 월드컵에선 이야기가 달라졌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한국은 하석주의 왼발 프리킥 골로 1대0으로 앞서나갔지만, 곧바로 하석주가 퇴장당했고 수적 열세 속에 경기는 1대3 역전패로 마무리됐다.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강렬했던 '환희→추락'의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멕시코는 한국에 아픔을 남겼다. 한국은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역습에 실점하며 끌려갔고, 손흥민의 왼발 중거리슛으로 한 골을 만회하는 데 그쳐 1대2로 졌다.
축구 세대가 20년이나 차이 나는 두 월드컵 경기는 공통점이 있다. 멕시코는 한국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들면서도 결국 승점은 내주지 않은 상대였다. 그런 노련한 면모가 지금 멕시코에게도 있다.
◆기록과 기억의 차이
멕시코가 한국 축구에 패배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주목할 사례가 있다. 8패도 4승도 아닌 3무 중 한 경기다. 2002년 북중미 골드컵 8강전이다.
한국은 북중미카리브축구연맹 대회에 초청팀으로 참가해 멕시코와 0대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이겨 4강에 올랐다. 공식 기록상으로는 무승부지만, 대회 결과상 한국이 멕시코를 넘어선 경기였다. 그것도 북중미에서. 반대로 생각해보자. 월드컵도 아닌 북중미 대회에서 대륙 최강권 멕시코는 8강 탈락이라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이 경기는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둔 대표팀이 북중미의 강호와 부딪히며 버티는 법을 익힌 무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에게 멕시코 축구는 두 개의 층위로 읽힌다. 기록의 층위에서 한국은 A매치 전적 열세, 월드컵 전적 전패다. 그러나 기억의 층위는 결이 좀 다르다. 1948년 첫 승리, 1998년 하석주가 남긴 교훈, 2002년 골드컵 승부차기 승, 2018년 손흥민의 만회골, 그리고 가장 최근 승부인 2025년 평가전 무승부가 있다.
이런 까닭에 2026 북중미 월드컵 멕시코전은 단순한 조별리그 두 번째 경기가 아니다. 한국 축구가 오랜 기간 마주한 북중미 문지기를 다시 만나는 싸움이다.
◆한국 축구가 다시 시작된 땅
멕시코 얘기를 좀 더 해보자. 개최국 멕시코는 상대이기 전에 장소이기도 하니까.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 무대에 본격적으로 복귀한 곳이 바로 1986 멕시코 월드컵이다.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긴 공백을 보낸 한국 축구는 1986년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이탈리아와 한 조에 묶였다. 아르헨티나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앞세워 결국 트로피를 들었고, 이탈리아는 직전 대회 챔피언이었다.
이렇게 거친 조에서 한국은 1무 2패로 탈락했다. 아르헨티나와 1대3, 불가리아와 1대1, 이탈리아와 2대3의 스코어를 기록했다. 숫자엔 담을 수 없는 한국 월드컵사의 첫 장면들이 있다. 박창선은 아르헨티나전에서 한국 월드컵 본선 첫 골을 넣었다. 불가리아전 무승부로 한국은 월드컵 본선에서 처음으로 귀한 승점 1점을 얻었다. 이탈리아전 1골 차 패배는 세계 정상급 팀을 상대로 끈질기게 따라붙어본 경기였다. 멕시코는 한국 축구가 월드컵이라는 무대의 호흡을 처음 배운 장소였다.
이후 한국은 마치 경제성장사처럼 축구 실력도 키운 걸까. 불과 16년 뒤 한국은 대회 4강에 올랐다. 1986년 멕시코 대회는 한국 축구의 월드컵 본선 연속 진출 행진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2026 북중미 월드컵까지 한국은 11회 연속 진출 기록을 쓴다.
◆한국은 2차전이 약하다?
다만 멕시코전에는 또 하나의 불편한 숫자가 따라붙는다. 한국이 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2002 한일 월드컵부터 21세기 6개 대회 기록만 따지면, 미국·프랑스와는 비겼고 아르헨티나·알제리·멕시코·가나엔 졌다. 2무 4패다. 같은 기간 조별리그 1차전에서 3승 2무 1패, 3차전에서 3승 1무 2패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유독 2차전의 성적이 무겁다.
이유를 단정하긴 어렵지만, 2차전은 첫 경기 결과에 따라 계산이 가장 복잡해지는 시점이다. 첫 판을 이기면 무리하지 않으려 하고, 비기거나 지면 반드시 승점이 필요해지며, 그 과정에서 한국은 흔들리고 무너진 경우가 많았다. 이번 대회 멕시코전도 바로 그 맥락에서 열린다. 개최국 이점까지 더한 강한 상대를 만나는 경기이면서, 한국 축구가 풀지 못한 '월드컵 2차전 무승'의 징크스를 대면하는 경기다.
◆체코라는 시험지
A조 첫 상대 체코는 승점 계산의 출발점이면서 유럽 중견급 강호를 상대로 대한민국이 대회 경쟁력을 처음 확인하는 시험지도 된다. 한국은 체코와 그간 3차례 A매치를 펼쳐 1승 1무 1패로 팽팽한 역대 전적을 기록 중이다. 1998년 서울에서 2대2로 비겼고, 한일 월드컵을 1년 앞둔 히딩크호의 2001년 원정에서는 0대5로 대패했다. 이어 2016년 체코 프라하에서 2대1로 이겼다. 3차례 모두 친선전 내지는 연습경기 형식이라 대회에서 작정하고 맞붙는 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체코는 앞선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엔 1962 칠레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하는 등 유럽 강호의 면모를 보였다. FIFA 랭킹 40위권인 지금은 그래도 여전히 강한 체격, 조직적 압박, 세트피스, 실용적인 경기 운영이 강점인 팀이다. 결국 월드컵 본선보다 통과 자체가 까다롭다고 평가받는 유럽 예선을 뚫고 올라온 팀이기도 하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개최된 월드컵 첫 경기에서 한국은 모두 4차례 만난 유럽 팀을 더는 막연한 공포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폴란드와 그리스를 꺾고 러시아와 비기면서 유럽 중견급 팀을 상대로 첫 판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았다. 그렇지만 2018 러시아 월드컵 때 스웨덴전 패배가 보여주듯 체격 우위와 조직력으로 촘촘한 수비 블록을 짠 팀과의 한 골 싸움은 여전히 조심해야 할 지점이다.
◆낯선 남아공, 3차전의 무게
3차전 상대 남아공은 체코보다 더 낯선 이름이다. 성인 남성 A대표팀 기준으로 한국과 남아공은 아직 맞붙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남아공 전은 상대 선수와 팀 컬러 등에 대한 정보력이 더 중요해 보이는 경기다.
물론 남아공이라는 이름 자체는 한국 축구에 낯설지 않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은 한국이 원정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오른 대회였다. 한국 축구는 비록 16강전에서 루이스 수아레스가 활약한 우루과이에 1대2로 석패했지만, 안방(2002 한일 월드컵)이 아니더라도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어느 팀에게나 3차전은 토너먼트 진출 당락이 좌우되는 경기인데, 한국은 최근 기록과 기억 모두 좋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경기 막판 황희찬의 극적 결승골로 2대1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선 강호 독일을 손흥민의 투혼 가득한 쐐기골로 2대0으로 제압하며 비록 16강엔 오르지 못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뒀다.
다만 이런 흐름을 타기 앞서 2014 브라질 월드컵 3차전에선 벨기에에 무기력하게 0대1로 지며 최종 1무 2패의 조별리그 성적으로 '실패한 월드컵'이라는 수식을 만든 바 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당시 사령탑을 맡았던 홍명보 감독이 이번 대회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게 됐다. 12년 전 결과에 대한 절치부심(切齒腐心)과 최근 2개 대회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함께 요구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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