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죽음의 땅. 봄을 맞아 푸른 생명의 힘찬 맥박을 힘차게 울려야 할 녹색공간엔 오히려 적막과 한탄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산불 현장, 화마(火魔)가 그 붉은 혀를 넘실대며 훑어 지나간 상흔은 처참 그 자체였다. 그뿐이랴. 억센 비라도 올라치면 잿투성이 빗물이 강을 이뤄 질척없이 흘러내리며 인근 생명체에도 큰 악영향을 미칠 터였다.
인두로 지진 듯, 백두대간의 허리격인 울진 검성리 일대를 사정없이 구겨버린 지난달 초순경의 산불 현장.
서울 여의도보다도 더 넓은 울창한 산림 350여ha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고작 3일간의 산불이 생태계 50년을 일순간 날려버린 것. 새하얀 도화지에 검은 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새까맣게 타 버린 천연림, 폭격을 맞은듯 뭉턱뭉턱 끊겨 나간 녹색 산줄기, 앙상한 줄기만 남긴채 흉칙한 몰골을 하고 서 있는 관목…. 울진의 산맥들은 말그대로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울진이 그토록 자랑하는 이 일대 지름 30∼40cm의 울진소나무(일명 금강송) 등 희귀목도 불에 타 거대한 숯덩이로 변했다. 산불 현장 곳곳에는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다 끝내 성난 불길에 삼켜 버린 토끼, 뱀, 개구리 등 야생동물들의 주검도 즐비했다. 울진 북부 지역에서만 서식한다는 흰꼬리 진달래, 풍란 등 희귀 초본식물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산불 피해 현장은 한마디로 '검은 사막'이었다.
불이 난지 10여일이 지나도록 검성리 일대는 골골이 매캐한 냄새를 풍겨댔다. 울진국유림 방의수 경영3팀장은 "산불 때문에 산림이 파괴됐다는 의미는 단순히 나무만 불에 탄 것이 아니라 식물, 동물, 토양, 미생물 등 생물구성 요인이 모두 사라진 생태계 파괴"라고 한탄했다.
섭씨 370도 안팎의 화염은 지상의 수목은 물론 지하 10cm의 곰팡이 버섯포자 등 미생물까지 모두 태워버리는데다 먹이 사슬의 토대마저 완전히 붕괴시킨다.
그는 "소나무는 활엽수와 달리 수분 함유가 적어 조금이라도 불에 휩싸이면 회생이 어렵다"며 "산림 회복에만도 최소 30년, 완전복구까지는 수백년이 걸린다"고도 했다.
송이 채취를 천업(天業)으로 삼는 북면 검성리와 나곡리 태봉 마을은 더욱 피해가 컸다.
울진지역은 98년 53.2t, 99년 65.2t의 송이를 생산하는 등 전국 최대 송이 생산지. 이 가운데 3%의 생산량을 보이는 검성리 일대 170여ha의 송이산이 잿더미로 변해 당분간 이 지역에서의 송이는 구경하기 어렵게 됐다.
1㎏에 10만원씩 치더라도 연간 2억원, 산림복구까지 30년간 송이생산이 어렵게 되면 피해액이 60억원을 웃돌 지경.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송이산에 올랐다는 임상승(45)씨는 "송이를 팔아 아이들 학자금도 마련하고 생계도 유지해 왔는데 이젠 살길이 막막하게 됐다"며 울먹였다.산불은 산만 망친게 아니다. 그대로 바다 생태계 파괴로까지 이어진다. 산에서 탄 초목의 재가 바람에 날리거나 빗물에 씻겨 바다로 흘러들어 해수가 산성화되면서 '바다의 사막화'를 만든다.
궁중 진상품으로 유명한 '고포미역'의 주 생산지인 북면 나곡리 고포마을.
이마을 주민들은 올 여름 장마철에 잿물이 바다로 흘러가 어류의 산란장을 위협하고 미역 생산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는 등 연안어장에 2차 피해를 입힐까 걱정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 마을 이상진(69)씨는 "재에 함유된 부유물질이 바다에 유입되면 화학적 산소 요구량(COD)이 많아져 식물성 플랑크톤의 광합성 작용을 방해, 미역생산에 차질이 불가피하다"며 맥을 놓았다.
죽변수협의 이길득씨는 "산림과 달리 어민들의 피해는 눈에 띄지 않는데다 산정도 어렵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피해는 엄청나다"며 "해양피해도 재해복구비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난달 17일 정오쯤 발생, 50ha의 산림을 태운 다음날 아침에서야 진정되기 시작한 고령군 팔미지역 산불 현장. 불에 약한 침엽수림인 소나무가 대중을 이뤄 강한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큰 피해를 불러 왔다. 불에 시꺼멓게 그을려 짚풀로 덮어둔 한 묘지앞 상석에 크게 금이 가 있어 당시 불의 기세를 웅변하고 있었다. 그나마 화마에 강한 참나무 등 활엽수 일부가 살아남아 한때 산림지였음을 식별할 정도.
"그런 까닭에 '임업적 방재'라고 불리는 혼효조림이 필요한 것이지요" 동행한 고령군 배수흠산림보호계장은 활엽수와 침엽수를 절반정도씩 섞어 조림하는 혼효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3월 초 발생한 산불로 임야 9ha가 불에 탄 봉화군 석포면 석포리 산 1번지 나래골 국유림. 20∼40년생 소나무 천연림이 들어섰던 이곳에서도 활엽수만이 나무색을 그나마 유지하며 드문드문 서있었으나 소나무 사이 사이의 땅은 잡초마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검게 타있었다. 이곳에서 송이를 채취해 온 석포면 석포리 일대 주민들도 농외소득은 이제 20~30년 기대할 수 없게 됐다며 혀를 찼다.
지난달 20일엔 비가 내리자 산불난 곳에서 잿물이 유입돼 인근 반야골 하천이 먹물색으로 변해버리기도 했다. 주민들은 "나무들이 대부분 타버려 여름철 폭우라도 내리면 언제 토사가 흘러 내릴지 몰라 벌써부터 장마철이 걱정된다"고 말했다.산림전문가들은 "산바닥에 깔린 재들은 수분의 흡수를 방해, 빗물을 그냥 흘려보내게 돼 산사태가 우려된다"며 "떼를 입히는 등 긴급조치로 땅속에 있는 유기물 유실을 최대한 막고 일정한 수분이 머금도록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그러나 산불의 고온탓에 미생물들이 모두 죽어 사막에 나무를 심는 격인 만큼 미생물 등이 어느 정도 복원된 2, 3년 후에야 조림이 가능해 공허한 얘기가 되고 있었다.
지난 달 8일 하룻만에 30여ha를 태워 버린 성주군 용암면 덕평리 일대 산불 현장. 임야 소유자인 신현옥(77·용암면 상언리)씨는 30년간 애지중지 가꾸어 온 자식같은 나무들이 숯검댕으로 변해가던 당시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산에 올라가 불탄 나무들을 쳐다보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정부가 경제수림으로 추천한 소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송진이 기폭제 역할을 해 산불이 대형화한 것 같아요"
신씨는 회한이 가득했다.
실화자가 밝혀지지 않고 있어 다만 정부가 간접보상으로 ha당 220만원 정도 지원하는 보조조림사업을 실시해 주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마저도 어느만큼 지원해 줄지 알 수 없다며 의문을 표시하고 있었다.
또 산불피해를 입은 나무는 여름철이 지나면 건조해져 목질부가 단단해지기 때문에 지금 베어내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조림사업비가 빨라야 내년에 지원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도 푸념했다. -朴鏞祐·金振萬·黃利珠기자
---네티즌 산불예방 의견
강원도 삼척을 비롯, 전국에서 산불이 잇따르자 산림청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korea.go.kr)에도 산불 예방 및 진화 등을 두고 많은 이들의 의견이 제기됐다.'양희용'으로 밝힌 이는 논·밭에서 쓰레기 등 농가 부산물을 태우다 산불이 자주 발생하고 있는 점을 들어 이를 퇴비화할 수 있도록 마을별로 필요한 장비 및 운반 등에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박성용'은 실화(失火)가 산불 원인의 대부분인 점을 지적하며 그 예방에 자원봉사자 제도를 적극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산별로 자원봉사자를 모집, 예방 활동에 종사케 하고 이들에겐 국·도립공원 입장료 무료나 공용주차료의 할인같은 혜택을 주자는 것. 또 일정 시간의 봉사활동이 필요한 중·고등학생 활용도 '산불예방, 체력단련, 봉사활동' 등 일석삼조의 효과를 낳을 것이라 했다.
'김상섭'은 일선 산림행정의 실태를 고발했다. 시·군 구조조정으로 산림과가 폐지되고 겨우 1, 2개 계로 살아남아 다른 과로 편성됐고 인원도 60%가량 준 실정이라고 했다. 특히 봄에는 조림이 겹쳐 산불이 날 경우 진화체계 인원구성대로 운용할 수 없어 지휘통솔요원(임업직)이 태부족, 상황유지도 제대로 못한다고 썼다. 또 산불관리가 산림청 관리소와 시·군으로 이원화돼 있어 산불 현장 출동시 관리소 직원들은 도면부터 보고 국·사유림 경계를 따져 사유림이면 대충 움직인다며 일원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승원'은 이와 관련, 전국의 소방서들을 한데 모은 소방청 신설이 시급하다며 특히 영동지방을 비롯한 전국의 국립공원 산간계곡에 소형 저수지 등을 전략적으로 배치, 산불진화는 물론 습도를 올려 화재 발생 빈도를 떨어뜨리는 등으로 활용해야한다고 했다.
서울 구로소방서 근무자라고 밝힌 '김호식'은 헬기 역할 못잖게 개인진압장비의 중요성을 들어 20ℓ 물에다 수성막포(소화액) 0.6ℓ를 섞은 고성능 개인 동력 펌프(휴대가능)를 이용, 발포하면 물로 진화하는 것과 비교, 100배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소개했다. 또 '김경호'로 밝힌 이는 산불진화용 포를 개발, 포탄에 진화용제를 담아 원거리에 쏘게되면 험한 산악지역 산불진화에 효과적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裵洪珞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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