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약령시 축제'
지난 13일부터 19일까지 대구시 중구 남성로 일대 약전골목에서 열린 약령시 축제행사는 지난 78년 이 축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성공작이란 평가가 내려졌다. 일주일간의 행사기간 동안 모두 21만7천여명이 찾은 것으로 집계됐고 십전대보탕과 향첩 등 관련 상품도 7천여만원어치나 팔려 나갔다. 지난 해 달구벌축제의 일환으로 열린 사흘간 6천여명이 그친데 비해 30배의 증가세이다. 말 그대로 눈비비고 다시 봐야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같은 성공이 우연히 찾아온 것은 아니다. 남다른 집념을 갖고 이를 이끌어온 '누군가'가 있었다. 백초당 한약방 대표이자 지난 78년 한의원과 한약방, 약업사 등 약전골목 350여 한방관련업소의 뜻있는 사람들이 약령시의 '화려한 재기'를 꿈꾸며 만든 (사)약령시 보존위원회 위원장이기도한 신전휘(60)씨.
약전골목 사람들은 신씨의 열정이 이같은 변화를 이끌어냈다는데 이론을 달지 않는다. 무력감에 빠져있던 약전골목에 큰 활력을 불어넣은 '허준'인 셈.
"천시(天時)와 지기(地機)가 맞아떨어진 셈이지요"그는 절대 자신의 공이 아니라고 손을 내젓는다. 한약재가 '제3의 약'으로 평가받는 세계적 흐름에다 TV드라마 '허준'의 인기 상종가에 따라 약령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덕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만 알고 지나치기엔 그의 '애살'이 각별했다. 지난 해 1월 고사끝에 약령시 보존위원장직을 맡게 되면서부터 그는 대구시와의 담판을 통해 가을철 달구벌축제행사와 함께 치러온 약령시행사를 봄철 축제로 독립시켰다. 달구벌축제에 묻혀 약령시행사가 죽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다음으론 지역에서 신망이 높은 이상희 전(前) 대구시장을 위원회 고문으로 영입했다. 처음엔 그 분이 무엇때문에 김빠진 맥주마냥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약령시행사를 위해 고문을 맡겠느냐는 회의의 소리도 높았지만 이 전시장을 만나 간청,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또 지난 해 7월부터 9월까지 세 차례 심포지엄을 통해 마련한 '대구약령시 발전방안'을 토대로 대구시 달서구 대곡동 생태공원내에 한약초식물원을 조성하고 약전골목을 한방테마거리로 만들기로 하는 등 대구지역을 명실상부한 '한의약업의 메카'로 정립하는 일에 나섰다.
"광릉수목원 등 단순한 수목원이나 식물원은 전국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구 경우는 약령시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뭔가 달라야 합니다. 이런 특성때문에라도 전국 유일의 한약초 전문식물원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번 행사기간 중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의 현장 교육은 물론 성인들로부터도 인기를 모은 자생약초 400여종 6천여점을 이용해 만든 약초동산과 야생초 사진전 등도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실 수십년 한약방 운영 이력으로 약재만 봐도 어떤 식물의 뿌리인지 훤한 그였지만 정작 약재의 모태인 식물전체 모습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떤 약재의 엄마격인지를 잘 몰랐다. 이런 식이어선 반쪽짜리 약제사밖에 못되겠다는 자성으로 그는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카메라를 둘러메고 약재로 사용되는 식물의 원모습을 찍고 익히는 일에 나섰다. 의성약초 시험재배장을 비롯 전국의 유명 약초시험재배장과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녔다. 생업을 지키면서 온 산야를 뒤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15년여. 그간에 쌓은 인맥들이 그가 약초동산을 구상하고 나섰을때 각자 한두포기씩 흔쾌히 내놓았고, 그렇게 찍은 2만컷의 자료사진들이 야생초 사진전으로 연결됐다.
청송 안덕이 고향인 신씨의 한약 인연은 30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부친이 부산에서 장사를 하다 실패, 고등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접은 신씨는 지난 60년대초 의성에서 한약방을 하던 이모부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한약과 처음 만나게 됐다. 약 3첩이면 웬만한 병들을 척척 고쳐내는 이모부의 신통력(?)과 한약의 신묘함에 점차 빠져들게 됐다. 당초엔 곧 자격시험이 있다는 침술사에 관심을 두었지만 한약의 신비한 효험에 관심이 기울어지면서 한약업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첫 시험에서는 고배를 들었다. 지역별로 열리는 시기가 달라 3년뒤 경기도에서 열린 시험에 재응시, 마침내 자격증을 얻게 됐다.
어렵사리 된 만큼 직업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던 것일까. 70년대초 약전골목에서 개업한 그는 신용과 성실로 주변 선배들에게 믿음을 사면서 약령시보존위 이사, 한약도매시장 사장 등 약전골목 지킴이로 자리를 굳혔다. 임기 2년인 보존회 위원장직도 그의 성실 때문에 지워진 '굴레'였던 셈이다.
그의 신심(愼心)은 본업인 한약업자로서도 다르지 않다. 자신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약을 지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감초처럼 국산이 없는 경우 외엔 국산 약재를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한방에 식약동원(食藥同源)이란 말이 있지요. 신토불이와 비슷한 개념인데 한약재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100리 내의 것을 써야 효험이 좋다는 뜻입니다"
남매를 둔 신씨는 장남이 경희대 한약학과에 재학중이어서 한약업자 2대를 이어갈 참이다. 그는 요즘도 틈만 나면 약초사진을 찍으러 다닌다. 듬직하게 자란 아들과 나란히 산과 들의 약초를 찾아 다니는 그 시간이 일상의 가장 큰 행복의 하나라고 했다.
"식물도감은 많이 나와있지만 한약재에 초점을 두고 만들어진 것은 아직 없어요. 그동안 600여종의 약재가 되는 식물 사진을 찍었지만 앞으로 아들이 더 보강해주었으면 합니다. 제대로 하려면 약초식물의 사계절 모습을 모두 담아야 온전한 약재 식물사진이 완성될 수 있거든요"
그는 조선조의 허준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그렇게 허준을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裵洪珞기자 bhr@imaeil.com
"한약 이름에는 일본말이 하나도 없어요. 이 분야만큼은 우리 것을 지켜왔다고 할 수 있지요"
"'청포도'를 지은 이 육사가 약전골목에서 한약장사하며 독립운동한 것 잘 모르지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작자 이상화도 약전골목에 집이 있었어요. 대구가 일제시대 저항도시로 인식된 데는 당시 사람과 자본의 집결지였던 약령시 역할이 적지 않았어요"
25일 오후 약전골목내에 위치한 약령시 전시관 3층 대회의실.
대구 약령시 축제 현장 답사에 나선 한양대 관광경영학과 학생을 대상으로 약령시 보존위원장인 신전휘씨가 350년 전통의 약령시를 풀어내는 열변에서는 유명강사 같은 구수한 입담도 입담이지만 '우리문화 지킴이'로서의 또다른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이번 약령시 축제가 성공적이었던 것도 우리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문화에 목말라 있다는 방증아니겠어요"
그는 이번 축제를 끝으로 보존위원회의 가장 큰 일중 하나를 처리했지만 행사 성공에 힘입어 축제가 끝났음에도 관심을 보이고 찾아오는 미국과 일본 등지 관광객들과 국내 답사객들의 이어지는 발길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바로 다음날에도 일본관광객들과 전국 시·도지사 부인 방문 등의 일정이 잡혀져 있었다.
그는 이날 20분여 강의를 이번 축제에 초청한 드라마 허준의 주인공 전광렬씨의 팬사인회 뒷 얘기로 마감했다.
"전씨가 사인회를 하는 장소에서 한 할머니가 전씨 손을 잡고는 '허준의원요. 오래전부터 팔, 다리가 자꾸 결려 아파 죽겠는데 지금 좀 나를 얼른 낫게 해 주이소'하고 놔 주지 않아 전씨가 혼이 났지요"
건강한 웃음이 전시관을 꽉 채웠다.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