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월산(2)선녀골 가는길

대구에서 영양으로 갈 때는 몰랐다. 길이 너무 잘 닦긴 것이 예사로웠지만 영양에서 일월산으로 갈 때는 그러나 어느새 마을이 바뀌어 있었다. 길이 너무 잘 닦여 미웠다. 일월산에 어울리지 않게 말끔이 포장된 길이 왠지 밉게만 느껴졌다. 저 산을 저렇게 민둥거리게 해놓고 골짝마다 산 허리마다 듬성듬성 농투성이들 뿐이건만 길만 잘 닦여 있다는게 미웠다. 속 상하게 미웠다.

미운 벌레가 모로 간다더니. 일월산 초입부터 웬 미운 이야기들이 이렇게 많이도 깔려 있을까. 이미 산은 여름 색깔로 짙으려 몸부림이다. 영양에서 출발해 한 20여분 달렸을까. 여기 또한 일월산 자락 이다. 갑자기 한 쪽 면이 벌겋게 드러나 흉물스럽게 버티고 있질 않은가. 용화 구리제련소. 미운 벌레. 금방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무너져 내린 토사들이 일대를 뒤덮을 것만 같다. 모든걸 삼킬 기세다. 절벽도 저렇게 흉칙한 절벽은 없을게다. 온 사방이 푸른데 무슨 심사로 저렇게 벌건 심통을 거침없이 부리고 있다는 말인가.

일본놈들. 비칭이 절로 나온다. 그러니까 70여년 전. 간악할대로 간악해진 일제가 이곳 일대에 구리광산을 개발했던 것이다. 일월광산. 질 좋은 구리는 그때 이미 대부분 캐 실어 가 버렸다. 남은 것은 이렇듯 폐광의 쓴 뒷자리 뿐이다. 아직도 제련소 앞을 흐르는 개울 바닥에는 시뻘건 쇳물이 밴 돌덩이가 나온다. 얼마나 지독한 약물들을 사용했기에 그럴까. 겉보기는 맑은 물이다. 아무리 물의 자정능력이 뛰어 나다고는 하지만 그 아랫물들이 온전 할리가 없다.

이 시대에 아직도 이런 구석이 있건만 하고 푸념과 체념을 안으로 삭이면서 다시 일월산으로 달린다. 5분도 채 안돼 왼쪽 개울가에 난데없이 평평하고 널따란 주차장이 나타난다. 건드리면 금방 먼지가 골짝 바람을 받아 푸석 회오리로 변할 듯 벌건 주차장이다. 울퉁불퉁 차를 세우자 자동차 앞 범퍼 위로 뻥 하고 서너 아름은 족히 될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물로 앞을 막아 두었건만 형식이란 걸 금방 알 수 있다.

구리광 입구다. 어득한 입구로 몸을 내미니 냉기가 으싸하게 스민다. 갑자기 모기인지 각다귀인지 떼거지로 달라 붙는다. 얼씨구 하며 물어 뜯기 시작한다. 어디서 배운 피빨음인가. 일제로 부터 배운 솜씨? 잔재? 달라 붙은 솜씨들이 보통이 아니다. 불을 켜 보지만 막무가내다. 이런 모진 각다귀들.

이런 광이 일월산에만 열 서너개가 넘는다고 동승한 영양군 공보실의 정두현계장(38)이 말해준다. 정계장은 끝까지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깊다고 했다. 조금만 들어가면 수직갱이 있고 그곳으로 구리석을 떨어뜨리면 이 구멍을 통해 좀 전의 심통스런 제련소로 보내겠다고 마치 당시를 훤히 내다 보는 투로 말 한다. 얼마나 이곳 주위 농투성이 어른들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그가 이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의 말 솜씨 안 쪽에는 우리의 민초들이 겪었을 슬픔과 애환이 자못 담담하게 품어 있는듯 해 되레 가슴 아프다. 얼마나 많은 피를 일제에 빼앗겼을까. 한 말? 한 섬? 아니다. 그 피는 일월산을 휘감아 도는 반변천을 흐르고도 남았으리라.

한 때, 이 골짝에만 300여명 민초들이 득실거렸다. 미국의 골드러시를 연상케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민초들에게는 총이 없었다. 그저 순응 뿐이었다. 일제의 간교한 꾀부림이나 농간에 놀아 나기만 했다. 구리를 캐기만 했다. 제련하기만 했다. 그리고 간교한 꾀돌이들은 푸짐한 봇짐을 메고 돌아 갔다. 민초들은 그러나 농간이 끝나자 또다시 일월산으로 방향없이 흩어졌다. 흩어질 때 민초들은 그러나 가벼운 봇짐 뿐이었으리라. 그 후 골짝은 적막강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행일까. 그 적막을 뚫는 인기척들이 해가 거듭될수록 늘고 있다. 일월산의 영험을 캐는 인기척들이다. 첫 구리광 입구에서 몇 발자국 안되는 자그마한 등성이 하나를 두고 용화사 가는 길과 선녀골 가는 길이 갈린다. 기실 용화사도 넓게는 선녀골이다. 그저 골에서 조금 빗겨 있다는 것 뿐이다.

걸어서 이 등성이를 넘기 약 5분. 누구나 시리고 찬 기운에 난데없이 감기는 기운을 느끼기란 어렵지 않다. 여기가 그 유명한 선녀골. 이 기운을 어른들은 음기라고 부른다. 저 태백산이 우람차고 남성답다 해 양(陽)이라 한다면 일월산은 비록 일자(日字)가 들기는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음(陰)이 충만한 산이라고 일렀다. 그래서 일월산을 영험스런 영산(靈山)이라는 것이다.

여성적인 산에 어울리게 선녀골은 아름다웠다. 시원했다. 요즘 미인들은 쭉뻗기만 하면 그만이다. 신장이 얼굴 길이의 8배 되는 몸이라는 팔등신(八等身)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오히려 열배는 훨씬 넘게 길어야 한다. 선녀골은 그러나 얼굴도 없고 몸도 없지만 꼭 팔등신만 같았다. 우리의 민초들이 등신같이 애타게 기다리기만 했던 그런 팔등신 같은 계곡이었다.

용화사는 나오는 길에 들르기로 하고 곧장 선녀골로 향한 것이다. 몇해전 먼 곳 사람들이 이 골로 들어 오면서 골짝 입구에 암자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요즘 토굴이 어디 토굴 같은 토굴이 있을까마는 암자 또한 암자 내음이 전혀 없다. 그저 생긴 대로 생긴 돌 몇 조각 세워두고 촛불에다 오색 헝겊이 앞 이마를 가리듯 늘어 세워져 있다.

그 옆에 떠 놓은 정화수 물이 미지근해 보일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할까.

우리 일행이 이런 좋은 환경에 왜 이런 부스럼 같은 암자를 지었을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가 보다. 어디서 왔느냐고 따질듯한 모양새로 중년의 여인이 묻는다. 물론 이쪽은 대꾸를 않는다. 이런 암자가 취재대상이 아니니 대꾸할 턱이 없다. 그저 언제 암자를 세웠느냐고 지나 가는 걸음으로 물었을 따름이다. 몇해 됐어요! 역시 퉁명스런 대답이다.

그러나 이 암자 주인은 대단한 산불감시원이라고 정 계장이 거든다. 이름도 일월이다. 진돗개 같기도 한 일월이를 앞세운 암자 주인이 계곡 위쪽에서 반기듯 알은 체를 한다. 50대에 갓 진입한 듯한 아저씨다. 일월산이 좋아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정말 일월산이 좋아서 일까? 아니면 일월산 어느 구석이 좋아서 일까? 괜한 말일까? "저런게 골칫덩어리죠" 언성을 약간 높이며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시커먼 장작더미가 타다 만채 뒹굴고 있었다.

"전국에서 몰려와 치성을 드리는데 아무리 말려도 안됩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차례 일월이와 함께 다니며 불을 피우는 것은 말리고 있지만 한마디로 힘에 부쳐요"

알고보면 전부가 외로운 사람들이다. 무엇이 억울해 치성을 드리고 무엇이 아쉬워 빌고 또 비는가. 돈? 사랑? 자식? 건강? 승진? 출세? 한이 없다. 새벽이슬 새벽서리 옷깃에 적셔가며 밤을 잊은 채 하늘에 혹은 바위에 혹은 컴컴한 굴속 덩그런 돌덩이에 비는 그 정성이 무엇이란 말인가. 촛불 켠 그 지극정성과 그 촛불로 산불이 난다하여 역시 지극정성으로 말려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도 선녀골은 그 맑은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잘 빗은 머릿결 모양으로 선녀골 골짝물은 잘잘대며 바위에 찰싹 달라 붙은채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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