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대 3부자 동반퇴진 선언 한달

지난달 31일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이 3부자 동반퇴진을 선언한 지 한달이 지난 지금 '거듭난 현대'를 갈망하던 국내외의 기대가 실망감으로 급속히 뒤바뀌고 있다.

간판문구가 바뀐 것 외에 '도대체 변한 게 뭐냐'는 회의론만이 현대 주변에서 떠돌고 있다. 공약(空約)은 시장의 불신뿐 아니라 현대 직원들의 사기조차 꺾어놓고 있다. 3부자 중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이 사표를 냈는데도 그 순수성을 의심하는 사내.외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퇴진은커녕 아예 '마이웨이'를 고집하고 있다.

재계는 퇴진선언 당시 현대의 위기가 유동성보다는 시장불신에 있었다는 점을다시금 상기하며 현대호의 항로에 전례없는 우려감을 나타내고 있다. 국내.외 투자가들 사이에서는 현대의 지배구조 개선 약속이나 구조조정 계획을 더이상 믿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불과 한달만에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동반퇴진 선언이후 한달간 현대의 변화를 점검해 본다.

◇'무늬만' 경영일선 퇴진=정 전명예회장의 3부자 동반퇴진 선언을 놓고 한국 재벌해체의 신호탄이라는 따위의 평가가 매우 옹색해졌다. 오히려 퇴진선언 당시 "경영일선 퇴진이 반드시 기업 지배권 포기가 아니다"라는 경제전문가들의 지적이적중했다는 얘기만 나온다. 이는 우선 3부자와 가신그룹의 변함없는 일상(日常)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최소한도의 변화도 시도하지 않으려는 안이한 태도의 일면이라는 점이 더 큰 문제라는 게 현대주변의 지적이다.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은 종전과 다름없이 '회장직 간판'만 떼어낸 12층 집무실에 그대로 출근하고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은 매일 오전 11시 정 전 명예회장의 점심시간때면 어김없이 청운동 자택에 들어간다. 정 전 명예회장의 '경협선구자'적 지위를 감안할 때 대북사업 현안을 보고받는 것은 무시하더라도 잦은 출입은 가신그룹이 그룹 중요현안을 일일이 보고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룹의 유일한 '실체'인 현대 구조조정위원회도 최소한의 가시적 변화도 원하지 않는 듯하다. 최근 배포된 보도자료에는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이라는문구가 자연스럽게 올라온다. 특히 정몽헌씨의 경우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이라는 공식직함이 있는데도 동반퇴진 발표가 한달도 지나기 전에 '전관예우' 차원에서 이사회회장으로 호칭을 통일키로 했다는 것은 사려깊지 못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동반퇴진을 거부한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말할 것도 없다.

◇전문경영인 영입은 '전무'= 동반퇴진 선언의 골자는 '전문경영인 체제의 구축'이다. 현대 구조조정위원회는 지난 5월31일 발표한 현대 경영개선 계획의 첫머리에 "조속한 시일내에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유능한 전문경영인을 등용, 육성하겠다"고 밝혔고 필요하면 외국인도 영입하겠다는 의지까지 표명했다.

그러나 한달이 지난 지금까지 기존 경영진인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과 박종섭 현대전자 사장이 각각이사회 의장으로 '재신임'된 것 외에 경영구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고 전문경영인도 영입되지 않았다. 현대측은 "각 사마다 이사회를 중심으로 알아서 판단할 것"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현대주변에서 수렴청정 체제가 아니냐고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가시적인 '인적 물갈이'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자동차 계열분리도 못지켜=현대 구조조정의 '핵'이자 대국민 약속이기도 한 현대자동차 소그룹 계열분리 신청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현대는 지난달 30일 역계열분리 신청을 강행한 뒤 '퇴짜'를 맞자 기다렸다는 듯이 "계열분리를 독려해야할 공정위가 오히려 가로막고 있다"며 '위약'의 책임을 정부측에 떠넘기고는 있지만 여론이 좀체 호응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현대주변에서는 역계열분리 발상 자체가 △현대가 계열분리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고 있고 △그룹이 자동차사업을 접수하려고하고 있다는 의혹만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로 인해 정 전 명예회장의 3부자 동반퇴진선언에 결정적인 흠을 남기게 됐고 '경제부흥의 일등공신'으로 존경받아야 할 정 전 명예회장에게까지 직격탄이 날아가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현대는 자동차소그룹 7개사(현대강관 포함) 외에 인천제철 계열 3개사, 티존코리아, 대한알루미늄, 현대에너지, 현대우주항공은 사실상 정리했다고 밝혔지만 자동차 계열분리 무산으로 구조조정의 효과는 반감됐다.

역계열분리 파문은 또 MK와 MH간의 불협화음을 또다시 재연시키는 우를 만들기도 했다.

◇유동성 확보도 '글쎄'=현대는 2조7천74억원, 부동산 6천988억원, 기타 사업부문 3천79억원 등 총 3조7천141억원의 자산을 올해안에 매각하고 신규투자 축소분인 2조2천억원을 합쳐 총 5조9천억원대의 유동성을 확보한다고 발표했었다. 현대는 한달간 '자체일정'에 따라 자산매각을 단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현대건설은 최근 현대자동차와 현대강관의 지분을 팔고 마북리 인력개발원 등 유휴부동산을 매각했으며 현대전자도 올해 6월까지 모두 5억달러의 자사주를 매각했다.또 현대증권은 현대투신운용 지분매각을 통해 9천억원의 외자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이처럼 계열사 자금난에서 비롯된 현대의 유동성 부족사태는 해결의 실마리를 잡은 것으로 보이지만 난관도 만만치 않다. 최근 주식시장 침체와 자금시장 경색이 쉽게 해소되지 않으면서 자산매각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여기에 채권단의 태도도 문제다. 현대가 역계열분리 신청을 둘러싸고 정부와 대치국면에 들어가면서 채권단의 협조여부가 불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이밖에 현대가 대대적으로 홍보한 '전계열사의 전략적 제휴 추진'도 한달내내 별 진전이 없다. 이미 올해초부터 다임러크라이슬러와 전략적 제휴를 추진해온 현대자동차는 제쳐두고라도 대부분의 계열사가 "진행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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