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 말복이 지났는데도 햇살이 불덩이를 매단 화살처럼 사정없이 내리꽂힌다. 어깨며 머리 위에 쏟아지는 열기가 기실 날씨 탓만은 아닌 듯하다.
지난 광복절, 남과 북은 분단 역사의 물굽이를 돌려놓는 참으로 의미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텔레비전 앞에 앉은 남과 북의 동포들은 너나 없이 가슴속에 출렁이는 감동의 물결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만나면 되는 일이 그리도 힘들었단 말인가. 부모와 자식이, 형제와 자매가 남과 북으로 흩어져 몸부림쳤던, 잠 못 이루고 애태웠던 지난 세월들이 참으로 무정하고도 허랑하다. 오랜 분단 세월에 젖먹이는 쉰을 넘기고 새까맣던 귀밑머리의 아내는 칠순을 넘긴 백발이 되었다. 대학 2학년때 잃어버린 아들을 위해 스무 해가 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했다는 구순 노모는 꿈에 그리던 그 아들을 만나는 순간 복받치는 설움에 그만 실신하고 만다.
짧은 만남 긴 이별
동족 상잔의 비극은 우리에게 몸을 찢는 분단과 이별의 상흔을 남겼지만 그 피의 흐름까지 끝내 막을 수는 없었다. 이데올로기에 갇혀 두 동강난 조국, 같은 말과 글을 쓰면서도 전혀 다른 사고로 강요받고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살아야 했던 그 허망한 세월. 서로 헐뜯고 총부리를 겨누고 북녘 오랑캐니 남쪽 승냥이니 하며 낭비한 세월 앞에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다.
고려호텔과 워커힐호텔에 모인 이산가족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남과 북에 두 가정을 이루게 된 늙은 가장의 하염없는 눈물……, 그러나 그 눈물의 깊이를 채 헤아리기도 전에 개인상봉의 시간은 끝나고, 연신 터지는 플래시 소리와 양측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텔레비전 화면은 다소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전쟁통에 잠깐 볼 일보러 나갔던 남편을 오십년이나 기다리며 두 아들을 키우고 살아 온 칠순을 넘긴 할머니. 북의 남편을 만났는데도 기쁨보다는 말문이 막힌 듯 덤덤한 모습에서 우리는 무정한 세월의 두께를 실감하게 된다. 자식을 낳고 사랑으로 살다 헤어진 젊은 부부가 그 긴 세월동안 쌓이고 맺힌 한이 얼마이며 못 다한 말이 또 얼마이랴…. 그럴진대 그들의 심사와는 아랑곳없이 주위에서 마구 사진 촬영을 해대니 오십년 만에 얻은 금싸라기 시간을 보듬어주기는커녕 빼앗긴 기분마저 들었다.
눈물없인 볼수 없어
남쪽에서 간 가족과는 달리 북쪽에서 온 가족들이 밝힌 천편일률적인 방문 소감도 보는 이를 식상하게 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이루어낸 만남인가. 분단조국의 현실에 떠밀려 그들이 다한 치유키 어려운 상처와 그리움의 문신을 지우기도 전에 말머리마다 '위대한 장군'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분단 슬픔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산의 아픔을 서로 확인하고 속 깊은 이야기를 마음껏 나누기 위해 마련한 시간인데도 마치 남남처럼 만나 본심을 비껴간 헛말들이 허공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에선 온전히 씻어낼 수 없도록 억울한 일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남북의 이산가족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생사 확인을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산가족이 아닌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분단 현실 자체가 이미 이산의 상징인 것을.
나의 친척 가운데도 전쟁때 실종된 작은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신다. 졸지에 혼자가 된 작은 할머니도 예외 없이 행상과 잡일로 남매를 키우셨다 한다. 더러는 죽었을 거라고, 또 더러는 납북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말들이 무성했지만 작은 할머니는 반 백년의 세월을 오로지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오셨다. 생신 무렵이면 자꾸 꿈에 나타난다고 해서 몇해전부터는 아예 생산날에 제사상을 차리신다. 이번 이산가족 신청때도 기대를 했으나 연고자가 없다는 통보를 받자, 할머니는 그예 자리에 누우셨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남편을 위해 모진 세월을 바친 한 여인네도 이제 생의 등불이 꺼지려 한다.
마음의 통일이 더 중요
아무 준비없이, 그것이 이별인 줄도 모르고 이별을 한 수많은 이산가족들. 그들에게 이번 광복절의 의미는 또 다른 숙제로 남는다. 짧은 상봉의 시간도 끝나고 또다른 이별이 그들 앞에 놓여있다. 다시는 길고 긴 이별의 시간이 거듭되지 않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란다. 남북통일은 이념의 통일 이전에 이렇듯 애틋한 마음의 통일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
늦더위의 기승을 뿌리치며 나는 짬을 내 지리산 자락을 휘돌아 왔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한 지리산의 품속에 오늘의 기쁨과 아픔을 다 부려 놓았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얌전한 몸매에…" 돌아오는 휴게소의 텔레비전 화면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가수의 풍성한 음성이 그 산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우리는 남고 다시 그들은 갔다. 눈물의 온기만큼 지나가는 비가 한줄금 긋는다. 놓쳐버린 끊을 다시 잇기 위해, 견고한 만남의 사간을 위해 이제 우리 모두 아름다운 휴식이 필요한 때다.
지금 그 못다한 사랑이 칠천만 동포의 가슴속에 뜨겁게 풀무질을 하고 있다.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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