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DJ의 '침묵」

세상살이 하다보면 일상의 언어로서는 그 참뜻을 전달할 수 없는 심오한 '의미」들이 더러는 있기 마련이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면서 말없이 연꽃을 들어보이나 가섭(加葉)만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지었다는 염화시중(華示衆)의 고사가 바로 그런 경우다. 때에 따라서는 천마디 웅변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하는 무언(無言)의 대화가 더욱 효과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DJ가 28일 민주당 당직자들로부터 전당대회 준비 상황을 보고 받으며 무언(無言)으로 대노(大怒)했음을 표시했다 한다. DJ는 선거비 의혹에다 의료 파업, 장관 도덕성 문제 등 초대형 사건들이 잇따르는데도 속수무책인 채 당권 쟁탈에만 급급한 당 지도부에 대한 실망감을 한 일(一)자로 입을 꽉 다물고 한마디도 않는 것으로 대신 했다는 것이다. 평소 말 잘하기로 소문난 DJ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30분간 말 한마디 안했을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또 DJ식의 무언의 압력이 말 안듣고 딴전만 피는 여당 수뇌부에 신선한 자극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DJ의 '침묵」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다. 국정책임자로서 또 총선을 치른 여당의 총재로서 지금같은 실정(失政)이 중첩되면 으레 국민에게 먼저 "송구스럽다"고 사과하고 엄정한 조사로 한점 의혹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는게 원칙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도 DJ는 최근 정부와 여당에서 잇따라 대형비리 의혹이 불거지는데도 일언반구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이다.

더구나 DJ의 침묵을 거창하게 떠벌리는 측근들의 자세는 더욱 가관이다. 대통령이 당직자 보고를 들으며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물론 '분노의 표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굳이 "침묵으로 분노를 표시했다"며 거창하게 염화시중(?)식 과장법으로 떠벌릴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 대통령 책임제 하에서는 모든 국정의 책임은 그것이 선정(善政)이든 실정(失政)이든 대통령에게 모두 돌아간다. 때문에 대통령은 측근에게 분노하기전에 국민에게 사과하고 국정을 바로잡는게 원칙 아닐까. 그럼에도 대통령의 분노를 굳이 강조하는 저변에는 "대통령은 잘하고 있는데…"라는 식의 잘못된 충성심이 자리잡은 것같아 찜찜한 것이다.

김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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