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57년 신라 건국 이전 경주 상황을 '삼국사기'〈신라본기〉 혁거세 조는 "일찍이 조선(고조선)의 유민(遺民)들이 이곳에 들어와 계곡에다 각기 6촌락(村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고 하고 있다.
혁거세는 이들 촌락을 통합해 신라 건국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확장에 나서게된다.
하지만 이런 기록을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물론이고 이병도를 비롯한 해방 이후 한국학자들도 가짜라고 몰아붙였고 신라 건국연대를 4,500년이나 깎아내렸다.
이럴 즈음 1977년 11월 경주 중심부 경주 평야를 벗어난 외곽지대인 조양동 627의 6 김문환씨 집 마당에서 아주 이상한 토기 수십점이 쏟아졌다.
깜짝 놀란 당시 한병삼 국립경주박물관장은 79년 7월20일 이후 이 일대에 대한 본격 발굴에 들어가 1983년 1월13일까지 5차에 걸친 대규모 발굴을 벌였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시기적으로 조양동 유적은 기원전 1세기 이래 5~6세기에 걸쳐 있었지만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삼국사기'가 기록한 신라 건국 즈음에 해당하는 기원전 1세기 이래 기원후 3세기 즈음 고신라 각종 고분 유적과 유물이었다.이 유적이 처음 만들어진 연대 확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한시대 구리 거울과 함께 화려한 금속 문물과 토기들이 각종 고분에서 쏟아졌다.
조양동 발굴이 갖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신라건국이 연대가 꼭 BC 57년은 아니라 해도 이 즈음인 것만은 부인하기 힘들게 됐다.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유적임에도 어찌된 셈인지 발굴 보고서는 미적거리기만 했다. 발굴보고서 비용이 없다는 희한한 이유 때문에 조양동 발굴보고서는 1차 발굴이 완료된지 21년만에, 최종 5차 발굴이 끝난지 17년 동안이나 늑장을 부렸다.
이 보고서가 마침내 최근 경주박물관에서 제1권이 우선 나왔다.
"조양동 유적 보고서Ⅰ"은 1979년 4월19일 이후 그해 5월5일까지 30여평에 대해 실시된 제1차 발굴 성과만 담았다. 나머지 2~5차 발굴 성과는 곧 발간 예정인 제2권에 담게 된다.
신라 건국과 대단히 밀접한 성과는 제1권이 아니라 2권에 들어있다.
1권에는 3세기 후반 이래 5~6세기까지 목곽묘와 석곽묘, 옹관묘 등 14기에 이르는 고분을 발굴해 확인된 각종 유물 180여점에 대한 발굴 성과가 들어있다.
하지만 1차 발굴 성과를 무시할 수 없는 게 이를 통해 고신라에서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왕릉(급) 대형 적석목곽묘 뿐만 아니라 당시 경주 사회에 목곽묘와 석곽묘, 옹관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데 있다.
또 1차 발굴 지역에서 확인된 유물과 유적이 2~5차에서 확인된 그 이전, 즉 기원전 1~기원후 3세기 다른 조양동 유적과 유물에 비해 오히려 수준이 대단히 떨어진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와 관련, 한병삼씨는 "서기 1~3세기대에 우월한 묘가 축조되다가 1차 발굴에서 주로 확인된 5~6세기대에 대형묘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음은 신라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