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정호칼럼-박정희와 김대중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의 위상은 독일 현대사의 아데나워와 브란트 두 사람의 위상을 연상케 한다. 박정희는 1971년 대선의 적수 김대중을 철저히 미워했고 박해를 가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심지어 김대중을 '지워버리려'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총리직에 도전한 브란트도 아데나워의 미움을 사고 갖은 수모를 겪었다. 1961년 총선 당시, 85세 고령의 아데나워는 브란트의 미혼모 이름을 선거유세장서 밝혀 37세나 연하의 정적이 사생아임을 대중앞에 폭로하는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란트는 아데나워의 후계자가 되고 김대중이 박정희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유럽통합을 통해 전후의 서독을 결정적으로 서방체제에 편입한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은 동유럽과의 화해로 동서긴장완화를 성취한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보완됨으로써 비로소 둥근 원을 그었다.

한국의 근대화는 박정희가 밀어붙인 '산업화(경제발전)'의 성취에 김대중의 대장정 '민주화(정치발전)'의 성취가 이어짐으로써 한 원을 닫아가고 있다.

인물은 언제나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만 그 참된 '크기'가 인식되는 것일까?

독일 통일보다 서유럽 통합을 우선한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은 독일 국내에선 맹렬한 반대.비난.비방을 받았다. 그 와중에 아데나워를 비스마르크 이래의 대정치가로 처음 평가한 것은 도버해협 건너에서 유럽대륙을 멀리 전망한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었다. 동독의 '소비에트 괴뢰정권'을 국가로 승인하고 오더.나이세강을 독일.폴란드의 항구적 국경으로 인정한 브란트의 동방정책도 국내에선 야당뿐만 아니라 동쪽에서 쫓겨온 실향민들, 심지어 일부 여당의원까지도 가세한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한 브란트를 '이 해의 인물'로 맨 먼저 추대한 것은 미국의 '타임'지였고 스칸디나비아의 노벨위원회는 그에게 평화상을 수여하였다.

5천년 가난의 한을 씻고 한국을 중화학 산업국가로 탈바꿈시켜 놓겠다는 '조국의 근대화'를 온갖 '비근대적' 수단을 동원하여 추구, 성취한 박정희-. 그의 사후 20년이 지난 지금엔 많은 국민들이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도 있지만 집권 당시의 박정희는 별 인기가 없었다. 그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해서도 국내에선 회의적.부정적 평가가 특히 재야와 지식인 사회에선 드셌다. 그러나 1970년 중반부터 이미 유럽의 권위지에선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를 패전국 서독과 일본의 경제부흥에 이어 2차대전후의 세계가 경험하는 '제3의 경제기적'이라 평가하고 있었다.

박정희 이래 군부정권 30년에 걸친 지역감정 부추김과 각종 음해로 모함받아온 김대중도 국내에선 호남권역 밖에선 큰 인기가 없다. 대통령 당선후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대북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도 국론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해외에선 그를 일찍부터 체코의 하벨, 남아공의 만델라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그는 국제공론권을 주도하는 정치지도자나 해외 언론인들 사이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고 대북'햇볕'정책도 일본.미국.유럽 그리고 중국.러시아에서조차 한결같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일본의 권위지 '아사히'신문이 사설에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수상'이라고 축하한 김대중 대통령의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은 그에 대한 위와 같은 세계적인 평가의 귀결이었다고 할 것이다.

독일과 한국의 현대사회는 물론 다른 점도 많다. 그 중의 하나는 독일이 여야를 초월해서 아데나워.브란트 등 전국민적인 존경을 받는 정치지도자를 갖고 있는데 비해서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지난 해 대구에서 숙적 박정희의 역사적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우리들의 정치지도자 평가에도 긍정적인 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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