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남산동. 차 한 대가 겨우 빠져 나갈까 싶은 좁은 골목 한 귀퉁이에 '대광 맹인 불자회'가 있었다. 부처님이 내려다 보는 앞에서 몇명의 맹인들이 언성을 높이고 서로 밀치면서 한바탕 질펀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꾸짖어야 옳을듯 했지만, 스님은 옆에서 오히려 만족스러운듯 껄껄 웃고 있었다. 어쩐지 되레 신바람이라도 난 것 같았다. "기 죽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들인 줄 알았더니 부처님 앞에서 싸움까지 할 줄 아네? 됐다, 됐어!"
50여명 맹인 불자 지팡이
그는 이 불자회의 법사 설호(59) 스님. 10년째 변함없이 맹인 불자들과 함께 경전을 풀고 예불을 올려 오고 있다고 했다. 먼길을 더듬어 오느라 지각하는 불자가 종종 있지만 스님은 늘 미리 도착해 법회를 준비한다. 단 한번도 핑계대고 미룬 적이 없다.
이곳 법회는 매주 금요일 오후 3시면 어김없이 시작된다. 법사 스님을 모시지 못해 애태우던 불자들 앞에 10여년 전 설호스님이 나타난 이래 변함이 없다. 20평 남짓한 좁은 공간, 50여명의 맹인 불자들이 정좌하고 스님 법어에 귀를 기울인다.설호스님은 울퉁불퉁한 길을 불안하게 걷는 맹인 불자들의 지팡이. 어디가 젖어 있는지, 어디쯤이 푹 꺼진 곳인지 설명한다. 그러나 길만 말할 뿐 당기거나 밀어주지는 않는다. 젖은 곳을 피하라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태연히 건너라 할 뿐. "앞이 안 보인다고 늘 남 신세만 지려 해서는 안되지. 불우이웃은 눈을 감아도 잘 보이는 법이야". 그래서일까? 여기 불자들은 자신도 맹인이면서 원폭 피해자, 불우 노인 등 이웃을 위로하는 도를 행하고 있다.
남 신세만 지려 해선 안돼
스님의 바랑은 화수분. 텅 빈 듯 보이지만 한없이 끄집어 낸다. 추석 때면 햅쌀을 구해 맹인 가족들이 제상에 올릴 수 있도록 펴 놓는다. 김장 때면 어김없이 배추와 무를 쏟아 낸다. 초파일엔 낯선 성당과 교회의 맹인들에게도 작으나마 선물을 보낸다.
스님에게 종교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분류되는 것만도 어처구니 없는 판. 그런 장애인이 또 종교를 따라 나뉜대서야 말이나 될 일인가?봉사라니? 설호스님은 그런 따위는 모른다고 했다. 그의 얼굴이 어쩐지 부처님을 닮아 가는 듯 했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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