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진향과 진미

산은 가을옷으로 갈아입고 나무들은 화려한 성장(盛裝)을 하고 있다. 새로 바른 창호지에 비쳐드는 가을 햇살이 따뜻하고 투명해서 삶의 여백을 나누어 주고 싶어진다. 이제는 개울물 소리도 간장처럼 졸아져서 맛있게 들린다.

오늘은 드물게 네 차례나 차(茶)를 마셨다. 차는 혼자서 한가롭게 홀로 마실때 차의 진향진미(眞香眞味)를 온전히 맛볼 수 있다.

가끔 생각하지만 산 중에 차가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차는 역시 우리 땅에서 자란 작설(雀舌)이 으뜸이다. 중국차는 어쩐지 큼큼하고 일본차는 조미료 냄새가 난다.

좋은 차를 마신 날은 마음도 기꺼워지고 차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생긴다. 이런 날은 다기(茶器)의 감촉도 새로워서 오래도록 찻잔을 만지작 거리곤 한다. 오늘처럼 여러 번 손님을 위한 차는 덤덤해서 보시(布施)가 되고 만다.

내가 차를 처음 맛본 것은 지난 70년대 중반 불갑사에서였다. 낙조가 아름다운 해불암 주위와 경내에서 자란 자생차로 만든 덖음차를 조실스님이 수산노사가 다려주셨는데 첫 잔을 입에 댔다가 너무 쓰서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때는 그저 쓰디쓴 물일 뿐이었다.

지금처럼 향기와 차신(茶身)을 갖춘 차는 통도사에서였다. 도응스님이 강원에서 다각(茶角)소임을 봤는데 점심공양 후 꼭 찻자리를 마련, 다담을 즐기면서부터 차를 가까이 하게됐다. 훗날 어머님께 우전차를 다려올렸더니 "첫 햅쌀로 지은 밥같네요"하시며 "차가 간도 딱 맞다"고 하셨었다.

맛과 향기에 있어서 우리의 어머니들을 따라갈 순 없을 것이다. 어머니보다 더 좋은 스승은 있을 수 없다. 어머님을 생각하면 내 안에서는 꽃이 피고 물이 흐른다.적천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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