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한 영세민 아파트 앞 삼거리. 77세 되신 신교순 할머니가 야채·과일을 팔고 있었다. 날카로운 겨울 바람이 할머니의 난전을 모질게 할퀴고 지나갔다. 털 목도리를 친친 감았고 낡은 스웨터를 켜켜이 입었지만 칼바람엔 속수무책. 어느 쪽에도 바람막이는 없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낮 12시부터 인적 드문 밤 11시까지 난전을 지킨다.
이곳은 가난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마을. 야채와 과일이 제때 팔릴리 없다. 팔리지 못한 과일은 이 겨울에도 조금씩 썩어간다. 썩어도 할머니는 아까워 과일을 버리지 못하고, 야채·과일 파는 일 또한 그만둘 수 없다. 고등학교 다니는 손자의 뒷바라지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매월 지급 받는 기초생활 보장비는 20여만원. 그 돈으로 손자와 한달을 살아낼 수는 없다. 야채·과일 난전을 해 20여만원이나마 덧보태도 힘겹다. 평수 좁은 영세민 아파트라지만 관리비만도 6, 7만원이나 되고, 아파트 임차료 또한 몇만원은 된다. 손자의 교통비·책값·용돈도 적잖은 부담이다.
할머니가 가난한 것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6·25 전쟁 때 금방 다녀 오겠노라며 떠난 남편은 여태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 있다면 80세. 페인트칠 기술자였다. 함께 국민병으로 떠났던 마을 젊은이들 중 반은 금세 돌아왔지만, 남편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린 것이 벌써 50년. 지금도 주소는 바꾸지 않고 있다. 서울시 마포구 구수동13. 여전히 기다리는 중이다.
어린 딸 셋은 전쟁통에 굶주림이나 사고로 죽었다. 함께 사는 손자도 엄마 없는 족내 손자. 젊은 시절엔 김밥·비단 장수를 했다. 친정 동생들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켰다. 그때 번 돈으로 집도 한 채 마련 했었지만, 길에 들어 가느라 3만8천원 남짓한 보상금에 넘겨줘야 했다.
6·25는 끝났지만 할머니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딸,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의 전쟁, 가난과의 전쟁… 그리움은 세월 따라 조금씩 바래져 갔다. 하지만 가난과의 전쟁에선 아무래도 패색이 짙다. 이제는 몸조차 지탱하기 힘들 만큼 늙었다. 허리는 남 부끄러울 정도로 휘었고, 지팡이 없이는 걷기도 힘들다.
지금 할머니를 가장 두렵게 하고 있는 것은 아파트 임차료. 10평 남짓한 임대 아파트의 재계약 기간이 만료됐으나 밀린 40만원을 못갚아 재계약을 할 수 없다. 통사정 해 미루기는 했지만, 며칠 내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거리로 나 앉아야 한다.기초생활 보장비와 야채·과일 판 돈으로는 임차료를 내기 힘들었다. 한창 커는 손자를 굶길 수도 없는 일이고, 학교 또한 안보낼 수 없는 일. 전기나 수돗물이 끊기는 일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밀려 나가느니 임대료였다.
뼛속까지 시린 겨울 바람 속에서 오늘도 난전을 지키는 신 할머니. 늙고 병든 몸으로 이 겨울을 건너기가 할머니에겐 너무 벅차 보였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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