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의사 김동선의 중앙아 이야기

톈산! 한자로 천산(天山)이라 쓰는 그 이름만으로도 위엄이 대단한 산. 중국과 카자흐스탄을 가르며 무려 400㎞ 전후에 달하는 두터움으로 3천㎞를 내리 달린다.카자흐의 수도 알마아타를 동남쪽으로 둘러싼 톈산산맥은 곳곳에 4천m 이상의 고봉을 위병처럼 세워 놨다. 최고봉 높이는 무려 7천500여m. 그러나 전문가들만 등산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 단위 등산객들도 숱하다.

필자도 1박2일 일정으로 해발 4천200m 봉우리 '깜사몰'에 오른 적이 있었다. 10세 위인 러시아 친구 '미샤'가 동행, 많은 격려를 하고 도와줬다. 그는 옛 소련의 스키 국가대표 선수였으며, 전문 산악인이었다.

고산증으로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거대한 만년설 정상에서 바라본 세상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발 아래로 보이는 수많은 고봉들은 하양과 회색으로 구별됐다. 하양은 만년설을 인 봉우리, 회색은 바위 봉우리였다. 미샤는 봉우리의 색깔로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의 산들과 달리 톈산산맥엔 흙이나 풀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바위와 자갈. 그 틈새로 작은 풀과 꽃들이 힘겹게 솟아 있을 뿐이었다. 만년설이 녹아 고산 이곳 저곳을 헤집으며 때로는 큰 강까지 이루며 흐르는 물이 바로 알마아타의 젖이다. 물은 때로 맑고 깨끗해 보였지만, 고이면 쌀뜨물처럼 뿌엿다. 녹아 있는 석회질 때문이었다. 그 물을 그냥 받아 마시면 치아가 상하고 소화불량이 생긴다. 받아 놨다가 석회질이 가라앉고 난 후에야 마실 수 있었다.

아름답지만 우리 고국 땅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초원의 나라 카자흐스탄. 12만명 이상의 고려인들은 그 낯선 땅에서 어떻게 살아 갈까?

그곳 고려인은 정착 과정과 현지 삶에서 몇가지 서로 다른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앞서 소개했던 석 니꼴라이처럼 일제 징용을 거쳐 강제 이주된 경우도 있었고, 이미 그 훨씬 전에 조국을 떠나 연해주·원동(러시아권) 등으로 흩어져 살다 강제 이주된 사람도 있었다. 또 드물기는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 정권을 피해 숨어든 사람도 있었다.

그 중 카자흐 헌법재판소장 김유리 알렉세이비치는 카자흐적인 삶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가는 유형이었다. 그는 강제이주 2세. 필자는 격무와 과로 때문에 얻은 그의 '안면신경 경련' 및 '안루 과다증'을 치료하면서 그와 만나게 됐었다.

이민족이면서도 그 나라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평생 긴장해야 했고 성실해야 했던 것은 물론일 터. 더욱이 카자흐에서 요직에 오르려면 필수적으로 카자흐 말을 할 수 있어야 했다. 소련 치하에서는 민족적 색채가 철저히 금지됐었지만, 독립 후 상황이 달라졌던 것이다.

김유리씨는 한반도 역사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왜 이 먼 타향까지 와 있어야 하는지, 수많은 고려인들이 어떻게 죽어 갔는지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민족적 색채를 감추며 살고 있다. 그래야 자리를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엎드린 채 사태를 관망하는 사바나의 사자를 연상케 하는 태도. 그를 보면서, 이민족으로서 철저한 카자흐인으로 살아 가는 것이 어쩌면 고려인으로 살기 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른 삶의 한 유형은 당시에 이미 80대에 접어 들었던(현재 89세) 국립 카자흐대 철학과 박일 교수에게서 볼 수 있었다. 그는 현지 공산주의 이론의 1인자임과 동시에 한국어 강사였으며, 북한 체재에 대해 독설과 비판을 서슴지 않는 체구 작은 백발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김유리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우선 카자흐에 들어 간 배경부터 달랐다. 북한에서 김일성대 초대 부총장을 역임했고, 숙청돼 1958년도에 쫓겨났다고 했다. 그는 늘 한자와 주역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서 한민족을 빼면 아무런 이야기도 성립될 수 없었다. 그는 카자흐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임과 동시에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철저한 민족주의자'라 불렀다.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이런 분명한 태도에 대해 의견이 양분됐다. '정신적 지주'라는 평과, 좬오히려 그 민족주의 때문에 더 힘들다좭는 평이 그것이었다. 필자가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는가 물었을 때 되돌아 온 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고려인이기 때문에'

10월 말이면 접어드는 카자흐의 겨울은 3월 말은 돼야 풀린다. 영하 25도의 겨울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난방도 제대로 안되는 방에서 이불 뒤집어 쓰고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는 북한 체제 비판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작년 여름에는 북한요원으로 보이는 괴한들에 의해 테러를 당해 머리뼈가 부서지는 큰 상해를 입기도 했다.

기적적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혼자 힘으로 걸을 수도 없을 만큼 큰 후유증이 뒤따랐다. 정신적 충격도 엄청났다. 마침 알마아타에 진출했던 원불교 교당 도움으로 한국의 익산 원불교 요양원으로 와서야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마르고 작은 몸뚱이를 고국 땅 한 귀퉁이에 묻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김유리와 박일. 어느 쪽으로 더 마음 실기엔 상황이 너무도 어려웠다. 두 분 모두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고 운명에 저항하며 살아 왔을 뿐이라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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