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네들의 봄놀이을 읊은 화전노래'참꽃이 피었구나!' 어느 봄날 고운사에 들렀을 때 보살 한 분이 참꽃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봄을 반기는 모습이 자못 감동적이었다. 나는 참꽃을 보면 봄기운보다 따먹을 생각부터 든다. 계절의식보다 먹는 욕망이 앞선 탓이다. 참꽃에 대한 내 거친 욕망이 어느 시인의 '참꽃'이란 시에 서정적으로 잘 갈무리되어 있다. "학교 갈 때 / 우리가 막 따먹던 꽃 / 돌아올 적에 / 숙이 작은 입술에 따먹히던 / 하나뿐인 꽃 // 봄이면 / 제일 먼저 / 산을 내려와 / 사이다 병에 꽂히던 꽃"최근 조사에 의하면 참꽃(진달래)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목련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봄을 알려주는 화신(花信) 구실을 할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는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어른들에게는 화전놀이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진달래보다 '참꽃'이라 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고 익숙하다.
어화 우리 벗님네야 / 이러한 좋은 때를
부질없이 허송할까 / 화전이나 하여보세
상하촌 노소동무 / 차차로 의논하니
삼월동풍 좋은 경계 / 어느 곳이 제일인고
4월 초순 청명절을 지나면 참꽃이 한창이다. 이 때 마을 아낙네들이 맑은 날을 잡아 가까운 산으로 가서 참꽃을 따다 '화전(花煎)'을 붙여먹으며 즐기는 데 이를 화전놀이 또는 '꽃따림한다'고 한다. 어지간한 마을에는 화전계가 조직되어 있어, 소임을 맡은 유사가 의논해서 적절한 날을 잡고 부녀자들에게 통문을 돌려 알린다.
화전 가세 화전 가세 / 앞산 빈 봉 올라가세
화전놀음 안 갈란가 / 헌옷 벗어 새옷 입고
앞집에 친구들아 / 뒷집에 동무들아/ 화전놀이 가자스라
화전하는 날이 되면 부녀들은 길쌈을 멈추고 몸단장을 곱게 하며, 유사는 따로 화전놀이에 필요한 그릇과 기물들을 챙기는 등 준비를 한다.
구름같이 흩던 머리 / 화유수로 쓱쓱 빗어
은봉채와 금봉채로 / 반우얼도 못다하고
이마전 ~ 백동전에 / 은사나비 곱기 매고
색조 좋은 동화분을 / 꿀에 타서 마지 발라
오백통 무산죽을 / 소상반죽 구나 맞차
처매 밑에 숨기 꼽고 / 비양산을 받쳐들고
평소에 머리 손질을 하지 않아서 구름처럼 흩어진 머리를 하고 있던 노소 부녀들이 다투어 머리를 감아 빗고 동백꽃 기름에다 금은 봉차(鳳金又)와 백동 비녀로 머리 장식을 곱게 한 뒤에 색조 나는 분을 꿀에 타서 얼굴에 바른다. 노인네는 백통에다 소상반죽을 맞춘 담뱃대를 치마 밑에 감추어 꽂고, 봄볕에 그을지 않기 위해 우비로 쓰는 '비양산'까지 받쳐들었다. 예사 아낙들은 꿈꾸기 어려운 치레이다잎은 따서 입에 물고 / 꽃은 꺾어 머리 꽂고
양단 저구리 배로도 처매 입고 서서
앞을 보고 뒤를 봐도 / 평양기상 늬루 대체
예사 집안의 부녀들 차림도 볼 만하다. 금봉차나 백동 비녀의 머리 장식 대신에 꽃잎을 입에 물고 꽃가지를 꺾어서 머리에 꽂았으며, 양단저고리에다 비로도 치마까지 받쳐입었다. '평양기생이 누구로 도대체?' 하고 반문할 만큼 스스로 돌아봐도 미혹될 만하다.
화전놀음 놀러가세 / 어린 동상 앞서우고
청수옥수 물을랑 / 읖어먹어 보기도 하고
상상봉을 올러가니 경치좋다
몸단장을 마치면 어린 동생을 앞세우고 산을 오른다. 상중이거나 특별한 일을 앞둔 사람들 외에는 빈부귀천 없이 거의 모두 참가한다. '앞을 보고 뒤를 봐도 / 수야 모야 다 모옜네' 할 만큼 부녀들이 총출동하므로 마을이 텅 비었다고 한다. 길쌈일에 골몰하며 집안에 갇혀 있던 아낙들은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 계곡의 맑은 물을 손으로 퍼 마시기도 하고, 물이 오른 버드나무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하며 소나무 햇순인 솔기를 꺾어 송구를 씹어보기도 한다. 갖은 봄꽃들도 신기하고 골골이 들려오는 새소리도 흥겹다.
아롱다롱 꽃을 섞어 / 무렁무렁 짐을 내어
화문석을 널리 피고 / 그 서방 주자 카니
남 모르기 훔쳤쌓고 / 그 중에도 배 큰 댁은
염치도 무릅씨고 / 능큼능큼 다 먹드라
참꽃이 많이 피었고 경치도 좋은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번철을 걸고 화전 구울 차비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삼삼오오 참꽃을 딴다. '이 산 저 산 꽃을 따다/ 그득하니 씻어놓고', 찹쌀가루 반죽을 묽게 하여 기름 두른 번철에다 지져서 부치개를 만든다. 이때 참꽃을 모양이 나도록 얹어서 익히면 화전이 된다. 반죽에다 미리 참꽃을 섞기도 한다.
봄이 되면 양식이 귀해져서 나물죽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인데, 귀한 찹쌀가루로 구운 차진 맛의 화전은 탐닉할 만하다. 그래도 집에 두고 온 서방님 생각에, 어떤 새댁은 남 몰래 화전을 치마 밑에 감추는가 하면, 식욕이 왕성한 '배 큰 댁'은 염치불고하고 '능큼능큼' 다 먹어치운다. 가난한 부녀들의 인정과 정서가 해학적이다.
화전을 나누어 먹으며 노래와 춤을 즐기는가 하면 가사와 시를 짓고 낭송하기도 한다. '여보시오 동무님네 / 떡만 먹고 농담말고 / 온갖 경치 보는 대로 글이나 지어보세' 화전놀이가 여성들의 시회(詩會)이기도 했던 것이다.
솥을 돌로 괴어 놓은 개울가에서
흰 가루를 기름에 튀겨 꽃전을 부쳤네
한 젓가락 집어먹으니 입에 향기가 가득
일년 봄소식이 뱃속에 전해오네
김삿갓이 평양기녀들의 화전놀이 곁을 지나다가 합류를 하고 술과 화전을 얻어먹은 뒤에 답례로 지은 시이다. 입에 그득한 꽃향기와 뱃속까지 전해오는 봄소식을 절묘하게 읊었다.
석양을 바라보니 / 사오 세 되는 아이
오동오동 쫓아와서 / 아자매 형님이야
일모황혼 되었으니 / 진지 시기 늦어간다
그럭저럭 하루해가 기울어 석양이다. 남자들과 달리 해가 기웃하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저녁준비를 해야 한다. 놀이에 취해 있는 부녀들에게 너댓 살 먹은 계집아이가 저녁진지 때가 늦어간다고 아주머니와 형님을 닦달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러면 아낙들은 '늘어진 꽃가지를 / 옥수로 휘어잡고 / 험악한 산록지대 / 더듬더듬 내려와서' 집으로 내닫기 바쁘다. 화전놀이 갈 때의 느긋함과 달리 허겁지겁 돌아오는 처지가 안쓰럽다. 따라서 화전노래에는 봄놀이를 즐기는 여성의 처지가 잘 드러나 있긴 하되, 투철한 여성의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요즘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두고 반일감정은 고조되었으되 역사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선 정부부터 국민여론에 밀려서 뒤늦게 항의를 짐짓 한다. 역사왜곡 조짐은 진작부터 있었는데, 하나마나한 사후약방문 조치조차 마지못해 하는 셈이다. 국내의 친일인사 청산에 무관심한 정부가 일본의 역사왜곡에 외교력을 적극 발휘할 리 없다. 친일문제 청산은커녕 국민들의 열화 같은 촉구로 간신히 사법처리한 당대의 쿠데타 주역들까지 덜렁 풀어주는 것은 물론, 유신정권의 군부인물까지 새삼 끌어들여 공조하는 정권이 온전한 역사의식을 지녔을 까닭이 없다. 국민들도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흥분하면서 국내에 만발한 벚꽃축제에 관해서는 비판적 성찰조차 없다. 우리는 지금 '일본국화' 축제에 넋이 나가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역사의식이 마비되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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