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尙火)는 일생을 통한 항일운동가요 민족지사였다. 일제에 의해 구금되고 고문을 당하며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형극의 세월을 독야청청한 민족시인이었다. 상화의 독립운동은 기미년(1919년) 3월의 대구 독립만세 운동에서 비롯된다. 18세에 쓴 처녀시 '나의 침실로'란 대작을 탈고한지 6~7개월 뒤의 일이다.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을 2일 저녁에야 듣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우 백기만(白基萬·당시 대구고보 3년)이 3일 날이 밝자마자 상화를 찾았다. 대구의 호응 여부를 묻자 상화는 "그래야지 호기를 놓쳐서야 될 말인가"로 화답했다. 그리고 목우가 자신이 재학중인 대구 고보(지금의 경북고)의 학생동원을 맡고, 상화는 계성(啓聖)학교에 대한 연락책을 자청하면서 굳게 손을 잡았다.
번잡한 상화의 사랑방'담교장'이 위험하다고 판단, 운동본부를 이상쾌(李相快)의 사랑으로 옮긴 주동자들은 이만집(李萬集) 목사(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구교회)가 보낸 계성학교의 정원조와 논의 끝에 거사일을 큰 장(서문시장)날인 8일 오후 1시 정각으로 잡았다.
7일 상화는 독립선언문의 등사를 맡았고, 백기만과 이곤희·허범·하윤실·김주천 등은 이상쾌의 사랑에서 300여장의 태극기를 박아냈다. 시위행진이 벌어지면 산포하고 학생들에게 나눠 줄 것들이었다.
백기만은 후일 '상화와 고월'(청구출판사·1951)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상화는 우리들이 감옥으로 넘어간 후로도 최재화(崔載華·전 전국장로교총회장·현 최성구 안과원장 부친)와 군지역까지 돌아다니며 선언문을 뿌리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다가 다행히 검거망을 벗어나 경성으로 달아났다'.
저항시인 이상화는 이같은 대구의 3·8 만세시위 주동과 이후의 독립운동 공훈(독립유공자공훈록 제6권 650면)으로 1977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마음의 결정체인 시(詩)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개벽·1926년)로 항일선전포고를 한 상화는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걸핏하면 가택수색을 당했다.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李鍾岩)'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된 일도 있다고 한다.
상화는 3·1운동 이후 이념을 초월한 전민족적 항일세력이었던 신간회의 대구 비밀결사 조직인 '기역(ㄱ)당'의 핵심간부로 활동하다 1928년 7월 24일 검찰에 송치되기에 이른다.
1934년 경상북도 경찰부가 발행한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 244~246쪽 'ㄱ당사건' 기록에 따르면 노차용(盧且用)·장택원(張澤遠)·이강희(李康熙) 등 당시 상화와 함께 치안유지법위반 등으로 경찰에 체포된 'ㄱ당 사건' 관련자는 10명.
상화의 인적사항에는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부 서무간사·인쇄업·28세·대구부 남성정 311'로 기록돼 있다. 1928년 4월에 조직된'ㄱ당'은 그 운동방침에서 보듯 '만주의 농지를 개척하여 농민을 이주시키고, 청년동지를 중국 광동군관학교에 유학시켜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한편 이를 위한 국내의 자금모집과 일제에 대한 경고 및 대중 각성을 위해 친일파와 일제관리를 처단하는'것으로 나타나 있다.
김일수 영남대 국사학과 강사(40)는 "1920년대 후반 민족주의 좌파계열의 신간회에 대한 인식과 민족운동 방침은 'ㄱ당사건'을 통해서 잘 파악할 수 있다"며 "활동무대를 만주에 두고 무장투쟁 노선을 지향한 비밀결사 운동으로 구한말의 의병전쟁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관헌의 이목을 피하면서 한글의 첫글자인 'ㄱ'을 사용해 비밀결사의 이름을 정한 'ㄱ당'은 1928년 6월 11일 노차용이 동지 곽동영과 함께 권총을 들고 대구의 어느 부호집에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다 적발되면서 와해되고 말았다. 일제는 이사건을 빌미로 신간회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이때의 민족주의 비밀결사사건을 동아일보는 1928년 7월 13일자 '대구서활동맹렬(大邱署活動猛烈)…. 각처에서 청년검거'란 제하의 기사에서 '…지난 십일 오후에는 돌연히 부내에 거주하는 리상화(李相和) 리상쾌(李相快) 두 청년과··. 등을 검거하야 극비밀리에 엄중 취조중인 모양이라…'라고 보도하고 있다.
1935년 상화는 맏형 이상정(李相定) 장군의 투옥소식을 듣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군으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던 형을 만나 국내조직 등을 협의하고 이듬해 돌아온 상화는 곧 스파이 혐의로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어 온갖 고초를 당한후 2개월만에 석방됐다.
그후 교남학교(嶠南學校·대륜고)의 무보수 교사를 자청한 상화는 학생들에게 3·1운동과 관동대지진 체험담을 들려주다가 다시 영어의 신세가 됐다. 상화의 제자인 손만호(85) 전 대구상고 교장은 "당시 2학년 급장으로 민족의식이 높았던 선생님께 독립운동 이야기를 해달라는 학생들의 간청을 자주 전하곤 했다 "며 "그일로 선생이 출근길에 포박되어 끌려갔으며 건강악화로 이어진 것 같아 평생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상화는 작품보다 인격이 더 고결했다. 목우 백기만 시인은 생전에 "상화는 무척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경찰에 붙잡혀가도 자백을 않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명환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사무국장은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상화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가 불분명한게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다. 상화는 '尙火'란 그의 대표적인 호 자체가 자신의 혁명적인 사상과 독립운동가로서의 의지를 담고 있다.
청명한 지성과 송백(松栢)의 지조를 지녔던 상화. 그가 망국의 한을 안고 빼앗긴 들에서 영면한지 57년,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된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 '지금은 우리땅- 되찾은 들에 과연 봄은 왔는가?'.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도움주신 분=계명대 도서관, 동아일보, 대륜고, 김일수 영남대 강사, 김명환 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부 사무국장, 손만호 전 대구상고 교장, 정휘창 전 원화여중 교장.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