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모꾼들이 때맞춰 부르는 모내기 소리
모든 농사는 제 때가 있다. 농작물이 철따라 생육하고 결실하기 때문에 제 철을 놓치면 농사를 망치게 된다. 따라서 철든 어른들은 일 철을 제대로 알아서 척척 농사일을 추어낸다. 그러나 철모르는 어른들은 실기를 하기 일쑤이다. 지금 집권여당은 민심이반이 극심한 가운데 정풍파동에 휩싸여 있다. 국정쇄신을 실기한 탓이다. 지난 연말에 대통령이 국정쇄신을 약속했으나 3당 연정으로 엉뚱하게 가고 말았다. 최근의 인사쇄신 요구도 미적거리며 여론이 잠잠하기를 기대한다면 준비된 대통령은커녕 아직 철들지 않은 대통령이라 할 만하다. 옷로비 사건을 덮고 지나가려다 불거져서 특검제까지 가고도 아직 철나지 않았다면 예사 문제가 아니다.농군들은 일년의 시절을 잘 헤아려 농사일을 할 뿐 아니라, 하루 일도 때맞추어 한다. 모내기 소리도 아침·점심·저녁 소리를 때맞추어 부른다. 아침소리부터 들어보자.
새야 새야 북궁새야
니 어디서 자고 왔나
수양청청 버들가지
이리 흔들 자고 왔네
더러 '새야 새야 원앙새야'로 노래하기도 한다. 어젯밤에 어디서 자고 왔나 하고 잔 곳을 묻지만, 사실은 어젯밤에 어떻게 잤느냐 하고 잠자리 분위기를 묻는다. 따라서 수양버들 늘어진 가지에 흔들흔들 자고 왔다고 답한다. 부부가 사랑의 잠자리를 적극적으로 즐겼다는 말이다. 아직 어제 저녁 잠자리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다.
아침 님의 눈매를 보소
지난 간밤에 홀로여 잤소
지난 간밤에 홀로여 잤나
석달 열흘을 홀로 잤소
사랑을 노래하다 보면 사랑에서 소외된 사람을 잊기 쉽다. 그들로서는 간밤의 잠자리 자랑이 못마땅하다. 뒤늦게 눈치를 채고는 '혹시 간밤에 홀로 잤소?' 하고 미심쩍은 태도로 묻는다. 간밤에만 홀로 잤으면 다행이다. 석달 열흘을 홀로 잤다고 한다. 소박데기의 설음이 진하게 묻어난다.
아적 이슬 채전밭에
불대 꺾는 저 처자야
잎을랑 훑어서 광주리 담고
줄기 한 쌍 나를 줌세
간밤의 잠자리 추억만 노래할 수 없다. 이미 날은 밝아오고 있다. 새 날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아침 준비를 위해 채전밭에 나와 불대 곧 상추를 꺾는 처녀에게 관심을 돌린다. 총각이 잎은 따서 광주리에 담아가고 줄기 한 쌍은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 상추 잎과 줄기의 상징성이 사랑의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울밑 논을 싹 갈아서
물 드는 것 보기도 좋네
봉창 문을 반만 열고
임 드는 것 보기도 좋데이
모내기하려면 물이 논에 그득해야 한다. 자기 논의 물꼬에 물이 콸콸 들어오는 것을 보면 농부들은 무엇보다 기분이 좋다. '제 논에 물 들어가는 것하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보다 보기 좋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나 사랑에 들떠 있는 젊은이들은 다르다. 오히려 봉창문을 반쯤 열고 몰래 찾아드는 님 보는 일이 더 좋다. 점심나절 소리로 넘어간다.
멈아멈아 정심멈아
정심참이 늦었구나
밉쌀 닷말 찹쌀 닷말
이리다가도 늦었구나
아홉 칸 정지 안에
돌다가도 늦어졌네
샛별 겉은 점심밥골
반달 겉이도 떠나오네
니가 무슨 반달이로
초승달이 반달이지
모꾼들이 제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이 점심 때이다. 점심밥을 먹으며 허기도 면하려니와 막걸리로 갈증도 달래고 시원한 그늘에서 충분히 쉴 수도 있다. 게다가 점심밥골을 이고 오는 젊은 새댁들 구경도 만만찮은 즐거움이다. 그러나 점심시간은 대중없다. 새댁들이 점심밥골을 이고 논둑에 이르는 때가 곧 점심 때이다. 자연히 일꾼들은 진작부터 점심밥골이 나타나기만 목 빠지게 기다린다. 따라서 점심 소리는 으레 '멈아 멈아 정심멈아 정심밥이 늦었구나' 하고 시작된다. 쌀을 이느라 늦었는가, 또는 아홉 칸 넓은 부엌을 돌아다니느라 늦었는가, 많은 수저를 챙기느라 늦었는가 하고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한다. 그러다가 멀리서 점심밥골이 나타나면 샛별같이 반갑고 반달같이 예쁘기도 하다. 반달도 샛별도 아닌 줄 번연히 알지만 반달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반달이고 샛별보다 더 빛나는 샛별이 바로 점심밥골이다.
방실방실 윗는 님을
못다 보고 해가 지네
걱정말고 한탄마소
새는 날에 다시 보세
해 질 무렵에 하는 소리이다. 님과 함께 미소를 주고받으며 모내기를 하는 사람은 해가 지는 것이 오히려 안타깝다. 님을 종일 봐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일이 고되지 않고 볕이 뜨겁지도 않다. 다만 해가 지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잠 못 잘세 잠 못 잘세
궁디 시레 잠 못 잘세
덮어 주소 덮어 주소
한산 소매로 덮어주소
평풍 치고서 불 쓴 방에
임으야 손짓 알른하네
임의 손길이 알른한께
유자행내 진동 나네
한 여름이라도 님이 없는 사람은 외롭고 서럽다. 있는 님이 가까이 오면 덥다고 밀쳐내지만 님이 아예 없는 사람은 님 그리워 잠들지 못한다. 왜 하필 궁둥이가 시려서 잠 못 든다고 할까. 궁둥이는 성적 욕망의 상징이다. 무더위 속에서도 잠들지 못할 정도로 궁둥이가 시린 것은 님이 없는 탓이다. 성적 결핍에서 비롯된 고난이 궁둥이 시려 잠 못 이루는 밤으로 노래된 것이다.
님이 있는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병풍을 치고 불을 밝혀 놓은 아늑한 방에서 님의 손짓이 어른거린다. 병풍까지 쳐 두었으니 잠자리 준비로서 그만이다. 님의 손길이 문에 비쳐 어른거릴 때마다 유자 향내와 같은 새콤달콤한 냄새가 진동함을 느낀다. 사랑의 행위를 염두에 두고 느끼는 사랑의 향기가 곧 유자 향이다. 님의 손길만 어른거려도 유자 향기를 느끼는 예민한 사랑의 감각은 참으로 놀랄 만한 것이다.
초롱초롱 청사초롱
임의 방에 불 밝혀라
임도 눕고서 나도 누워
저 불 끌이 누구드냐
저녁 소리의 절정에 이르렀다. 청사초롱에 불을 밝히고 님도 눕고 나도 누웠다. 병풍과 청사초롱은 신방의 주요 인테리어이다. 병풍은 문틈으로 엿보는 불순한 눈길을 막아 주고 청사초롱은 신방 가까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경계표 구실을 한다. 따라서 신방에 들어 남녀가 함께 품고 누웠으면 불을 끌 사람이 없다. 누가 신방의 불을 끌 것인가. 사랑의 불도 끌 수 없지만 초롱불도 끌 수 없다. 결국 스스로 끄지 않으면 대신 꺼 줄 사람이 없다.
지금 김대중 정부는 권력사랑에 빠져 있다. 집권자로서 기득권을 누리며 정권재창출을 꿈꾸느라 병풍도 치지 않은 채 드러내놓고 권력사랑에 몰입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누구와 어떤 사랑을 부적절하게 즐기고 있는지,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국민들은 이제 고개를 돌리다 못해 손까지 내젓고 있다. 보다 못한 당내 젊은 의원들이 불을 끄러 나섰지만 대통령은 고유권한임을 내세워 기다리란다. 고유권한의 오류를 문제삼고 있는 판에 다시 그걸 내세워서 날 샌 뒤에 불을 끄면 무슨 소용인가. 대통령 임기를 생각하면 벌써 자정이 지나 날 샐 무렵이 임박했다. 대통령은 아직 철을 모르는가보다. 철은 기다리지 않고 끊임없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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