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이슥한 시간, 대구 중구 남산동 남문시장에 가면 콩국 파는 '리어카 아저씨'를 만날 수 있다. 서상길(56)씨. 도넛을 듬뿍 담은 콩국 그릇을 내미는 그의 얼굴은 사람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다. 18년째 한자리, 그 덕분에 서씨는 시장 일대는 물론이고 대구시내 택시기사들 사이에도 어지간히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먹을거리 장사와 달리 서씨의 콩국 리어카는 밤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7시 30분쯤부터 7시까지가 그의 영업시간. 집에서 끌고 온 리어카를 세우고 전을 펴는 동작은 익숙하다 못해 습관이 된 듯하다. 아무렇게나 던지듯 꺼내놓는 갖가지 상자와 바람막이 널판지는 이를 맞춘 듯 제자리를 찾아 든다.
서씨는 일요일과 제삿날을 빼고 하루도 장사를 거르지 않는다. 춥고 덥거나 아프다고 멀리서 찾아온 단골 손님들을 실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콩국을 찾는 사람들은 거개가 10년 이상 된 단골들. 재래시장이 점점 쇠락하는데다 남문시장은 특히 먹을거리 난전이 적어 맛을 따라 이 곳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텃세 때문인지, 음식장사들이 발을 붙이지 못해요. 포장마차를 들이밀었다가도 얼마 못 가 전을 접고 말아요. 상인이 없으니 손님도 덩달아 줄고…". 서씨는 이런 저런 이유로 남문 시장이 자꾸 작아진다며 아쉬워했다. 지금은 시장 일대의 다방 아가씨와 철없는 아이들까지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지만 그도 초창기엔 무척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서씨의 콩국 고객은 천차만별. 아저씨, 아줌마, 아가씨, 점잖은 공무원에서 막노동꾼까지. 신 새벽의 허기를 달래려는 택시기사들은 그 큰 그릇도 모자란다고 늘 아우성이다. 그들 틈에는 시내에서 콩국 파는 이들이 첩자(?)처럼 섞여 있다. 서씨의 콩국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서이다.
"음식은 요령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정성이지요". 서씨는 좥남문콩국 비기(秘技).를 가르쳐 달라고 통사정하는 이들에게 비법을 전해주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모양과 색깔은 엇비슷했지만 맛은 달랐다. 사람들은 조미료로 요령을 첨가했고 서씨는 정성을 보탠 때문일 것이다.
18년간의 콩국 장사. 세상은 참 많이 변했지만 서씨의 콩국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오랜 세월, 게으름이나 요령을 피울 때도 됐지만 그는 늘 그대로였고 손님들은 그 맛을 잊지 않았다.
서씨의 고향은 경북 상주. 40년 전 가난을 떨쳐버리겠다고 빈손으로 도시로 나왔다. 40여 호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두 번째로 중학교를 마친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의 고향은 가난했다. 서울과 대구에서 공장생활 수년. 돈을 벌기는커녕 대구 3공단에서 복사뼈를 다쳐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좥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묻어 둔 것이 화근이었다. 서씨는 둔해서가 아니라 시절이 그랬다고 덧붙였다.중학교 졸업학력이 전부인 서씨는 아이들에게 영어도, 수학도, 흔해빠진 특기하나도 가르치지 못했다. 그가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정직과 성실,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었다. 오랜 세월 불편한 다리를 끌며 살아왔지만 지금껏 장애인 등록을 미루어 왔던 것도 그때문이었다.
"저는 벌어먹고 살 힘이 있어요. 제가 빠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혜택이 갈 수 있으니까요". 서씨는 매주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좥사랑의 리퀘스트.에 ARS 전화를 건다. 네 식구가 한 통화씩, 모두 4통화를 수년 째 빼먹은 일이 없다고 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입을 열어 좥이래라, 저래라. 가르치지 않는다. 말없이 행동으로 보일 뿐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그대로 닮기 때문이다. 생계가 달린 밤 장사를 포기하면서도 제사에 빠지지 않는 이유도, 좥사랑의 리퀘스트.에 전화 내는 일을 빼먹지 않는 것도, 가난한 이에게 좥남문 콩국 비법.을 누설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상길씨는 올 추석때쯤 지금의 리어카 옆에 작은 점포를 낼 작정이다. 아픈 다리가 점점 더 쑤셔 리어카를 끄는 일도 이제 벅차기 때문이다. 간판엔 좥남문콩국.이라고 써 붙일 참이다. 여태 서씨의 리어카에는 간판도 상표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콩국을 좥남문콩국.이라고 불러왔고 서씨는 그 이름을 고맙게 받았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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