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의 시인 정지용(鄭芝溶)은 한국 현대시의 금자탑을 쌓은 거봉이다. 그는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한 이미지와 새로운 언어감각으로 우리 시를 탁월한 경지에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언어의 비유'로 한 장르를 일궜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그러나 1988년 해금조치 이전까지 그는 우리 문학사의 그늘에 묻혀 있어야만 했다. 시의 경향과는 무관하게 6.25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40여년이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다.
▲그가 종적을 감춘 것은 인민군 치하이던 1950년 7월 말이었다고 한다.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하다 칩거생활을 하던 서울 녹번동 초당에 후배 문인들이 찾아와 숨어 지내면 오해를 받게 되니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자수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그들을 따라 나간 뒤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 이후 그의 문학은 금기시됐고, 출판물에도 '정○용'이라는 식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지난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는 또 한번 '남북 분단'의 민족적 비극이 연출됐다. 그의 아들이 남한의 아버지를 찾는다고 신청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그를 아들이 행방조차 모르고 있어 다시 혼선이 빚어진 셈이니 두 겹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 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납북 중 비행기 폭격 사망설, 서울 수복 후 미군에 붙잡혀 일본 오키나와에서 처형됐다는 설 등으로 갈려 왔다.
▲최근 그가 6.25 전쟁이 한창일 때 전투기의 기관총 소사로 죽었다는 목격담이 처음 나와 그간의 베일이 일단 벗겨지게 됐다. 지난 8.15 평양축전에 참여한 시인 도종환씨가 북한의 문학평론가 조정호씨로부터 '통일문학 창작실'에 실장으로 함께 근무했던 수필가 석인해(95년 경 작고)씨에게 '정 시인과 함께 후퇴하던 중 비행기의 공습으로 기관총에 맞아 사망, 그 자리에 묻어 주었다'는 증언을 들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아무튼 정지용 시인에 얽힌 기막힌 사연들은 그동안 분단의 골이 얼마나 깊고, 그 아픔이 얼마나 컸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민족 분단과 더불어 행적이 뚜렷하지 않고,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이념의 희생양'이 돼 왔고, 문학사에마저 이름이 지워진 과오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우리 현대사의 유별난 '레드 콤플렉스'가 빚어낸 희화가 그의 일가 말고도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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