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경부 하행의 완행열차로말갛게 발효 중인 가을하오를 건넌다

차창 밖 야산의 단아한 봉분이

방금 햇짚으로 단장한 옛날의 초가지붕 같다

뜨락 반듯한 床石(상석)은

정갈하게 씻어둔 댓돌인 게지

낯선 모롱이 감돌아오다 아예 신발을 벗어버린 어느 누가

창백한 맨발 그대로 저 단칸오두막에 세 들었는지

다시 집 떠났는지

뽀오얀 코 고무신 한 켤레나

물기 질팍한 얼룩배기 운동화 한 짝, 하다못해

흙먼지 묻은 족적조차 놓여있지 않다

굳어져 낯익은 저 풍경의 뒤뜰을 돌아

소용돌이치며 홀로 익어가는 고요의 기슭에

-류인서 '하행'

시인 보들레르는 여행은 인간에게 잃어버린 자아를 되돌려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평론가 김현은 덧붙여 여행과 질병이 그렇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둘 다 사색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가을은 사색 하기 좋은 계절이다. 이 시를 쓴 시인처럼 하행 완행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 멀리 차창 밖으로 열을 내며 발효 중인 야산 단풍도 아름답고, 우리에게 문득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 봉분의 무덤도 만나고 싶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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