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진리로에 사는 기쁨

얼마 전부터 내가 사는 공동주택의 입구에 '진리로(路)'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다니면서 보니 온 도시의 거리마다 팻말이 세워져 있는데 아마 개개의 건물을 찾기 쉽게 정비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계획한 사람의 의도대로 된다면 서양의 대도시에서처럼 택시를 타고 거리이름과 번지만 말하면 운전사가 알아서 정확하게 목적지까지 데려주는 편리함을 누리게 될지 모른다.

이 도시의 수많은 거리에 일일이 아름다운 이름을 부여한다는 엄청난 일을 해낸 공무원들의 노고와 자상함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지만 (도시의 끝에서부터 그냥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놓은 뉴욕의 나태함과 비교해 보라!), 두 음절로 된 고귀한 뜻을 가진 단어가 그리 흔치는 않아서 일부 중복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시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많은 돈을 들여 시행한 것이 뜻한 바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새로운 이름을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이 시민으로서 마땅한 도리이겠지만 아직 한 번도 그 이름을 불러본 적은 없다. '진리로에 살아요' 또는 '진리로로 가주세요'라는 말을 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황당함은 무시하더라도, 마치 부정입학한 명문학교의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처럼 멋쩍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마 '봉사로' '성실로' '정직로' 등에 사는 주민들도 마찬가지 기분일 것이다. 우리의 행정가들에게는 못난 아이를 자꾸 칭찬함으로써 바르게 이끌어 주듯이 좋은 뜻의 이름을 지어서 불러줌으로써 시민을 계도한다는 깊은 뜻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새 이름을 붙임으로써 도시의 분위기가 고양된 느낌도 든다. 가령 '우정로'라는 곳이 있다면(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친구들끼리 싸우지는 않지 않겠는가. '근면로'에 살면서 하릴없이 빈둥대기는 아무래도 좀 어색할 것이다.

나의 경우도 아침저녁으로 팻말을 볼 때마다 뭔가 읽지 않는 책이라도 들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웃들이 진리탐구에 더욱 매진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

경북대 강사·가족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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