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라산-순백의 능선길 따라 눈꽃세상 속으로

오금이 저릴때쯤 돼야 펼쳐지는 눈꽃세상.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자 시야가 탁 트이며 부드러운 능선이 시작된다. 그 능선의 실루엣을 따라 끝없이 펼쳐지는 순백의 세상. 눈을 보면 마음이 환해져서 일까. 정상을 향한 발걸음에 다시 힘이 솟는다. 군락을 지어 서있는 구상나무는 눈꽃의 무게를 못이기고 가지가 밑으로 휘어지려 한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모습, 탄성이 나온다. 바로 겨울 한라산을 찾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정상으로 오를수록 수려한 눈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검은 바위가 눈을 덮어쓴 모습은 언뜻보면 한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구름도 눈앞에서 연신 춤을 춘다. 저멀리 제주시 앞바다 섬들이 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어느샌가 구름을 시켜 훼방놓는다. 이번엔 갑자기 눈이 내린다. 변화무쌍한 날씨, 종잡을 수가 없다. 한라산의 겨울은 이렇게 깊어간다.

한라산(漢拏山·1,950m), 화산분출로 생성된 휴화산이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368개나 되는 기생화산 '오름'이 오밀조밀 솟아 있다. 봄의 철쭉꽃, 여름의 녹음과 폭포수, 가을의 단풍도 절경이다. 그러나 겨울 한라산을 보지 않고는 봤다고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솟아오른 바위와 나뭇가지마다 피어나는 눈꽃의 장관 때문일까. 아니면 바람과 맞서 눈길을 조심스레 밟아야 하는 등반의 어려움에 비례하는 그 기억때문일까.

우선 한라산 산행은 녹록하지 않다. 적설기 정상 등반이 허용되는 성판악 코스가 편도 9.6km, 왕복 8시간 30분 거리다. 관음사 코스도 편도 8.7km, 왕복 9시간 가량이다. 윗세오름 대피소(1,700m)까지만 등반이 가능한 어리목(편도 4.7km)과 영실(편도 3.7km)코스는 2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한라산 등반은 손에 쥔 랜턴에 의존해 시작한다. 출발지는 성판악 입구, 새벽 6시 30분. 당일 산행을 원칙으로 하는 데다 주요 지점마다 입산통제 시간이 있기 때문에 이른 시간은 아니다. 등산코스별 입산시간과 하산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경우에는 등반을 포기해야 한다. 마음이 자꾸 앞서 걷는다.

어스름한 새벽, 등산로엔 안개가 자욱하다. 앞사람 발길만 쫓다가는 발이 돌에 채인다. 무리지은 행렬이 발소리만 남기고 앞서 질러간다. 등산로 정비를 끝낸 듯 나무판자를 잇대어 놓은 편한 길이 많아졌다. 아직까지는 바람도 잠잠하다.

2시간 만에 도착한 사라악 대피소(무인). 눈이 희끗희끗 보인다. 다음 진달래 대피소(유인)까지 또 1시간. 해발 표지판은 1천500m. 드디어 눈세상이 시작된다. 뽀드득 뽀드득 겨우내 얼어붙었을 성싶은 눈이 소리를 내며 장단을 맞춰준다. 그러나 미끈미끈한 눈길. 낙상조심. 이때부터 아이젠 착용은 필수다. 이제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 바람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낸다.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 만나는 눈꽃. 햇살에 반사된 자태가 시리도록 눈부시다. 그토록 만나고자한 순백의 미소, 언제까지 이대로 있겠다는 듯 단단히 매달려 있다. 웃음소리가 왁자하다. 사진촬영을 부탁하는 소리가 인삿말처럼 들린다.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한라산 정상은 구름에 휘감겨 있다. 저기였던가. 그 사이로 점점이 오르는 사람들이 푹 안겨 있는 것 같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정상이다. 이곳의 주인은 바람. 세차게 휘몰아 치는 기세가 예사 바람이 아니다. 푸른 하늘과 장막 같은 구름을 조종하는 연출자다. 정상을 밟고 섰더라도 사람들은 언제나 엑스트라. 바람이 자꾸 '어서 내려가라' 채근한다. 귓전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반대로 백록담은 아무 말이 없다. 조용하다. 잔설을 뒤집어쓰고 있는 오른쪽 귀퉁이에 얼음이 얼어 있을 뿐이다.

숨가쁜 순간이 지났으니 하산해야 할 시간. 절정의 기쁨이 지나가면 허전해 질 수도 있는 법. 내려가는 길은 약간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라산의 그 빛깔을, 그 자태를 모두 눈에 담고 나니 발걸음은 오를 때보다 더 가볍다.

글·사진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한라산 등반 유의점

한라산 국립공원관리사무소는 지난 99년 3월 1일부터 자연휴식년제를 시행, 등산로 훼손 우려가 적은 겨울 적설기를 제외하곤 정상 등반을 통제하고 있다. 1, 2월 적설기에도 성판악·관음사 2개 코스만 허용된다. 훼손이 심해 그동안 불편을 주었던 등산로를 대대적으로 정비, 등반시간을 어느정도 단축할 수 있게 됐고 사고 위험도 줄어들게 됐다.

사무소측은 빠르면 내년부터 지정된 코스에 한해 정상등반을 연중 실시할 계획이다. 당일 등산 원칙과 계절별·코스별 입산 및 하산시간은 계속 준수해야 한다. (www.provi n.cheju.kr. 성판악지구 064-758-8164. 관음사지구 064)-756-3730)

글·사진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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