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저 욕망의 껍데기들

도시 변두리에 총총히 들어서 있는 아파트의 행렬은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하마 정신이 아뜩해 온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고층 건물 아래 다가서면 그 어마어마한 높이에 압도당해 나라는 존재가 너무도 초라해 보인다.

이따금 산꼭대기에 올라 잿빛으로 흐려진 도시의 광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황혼에 젖은 창백한 묘석(墓石) 같다고 한 어느 시인의 표현이 기가 막히게 적확했음에 나는 탄복을 금치 못하곤 한다.

◈납골당 닮은 아파트 행렬

바둑판처럼 가로세로 질서정연하게 열 지어 늘어선 아파트 숲은 어찌 그리도 국립묘지의 그 새하얀 묘비석들을 쏙 빼 닮았을까. 마치 죽은 자들의 혼백을 모셔다 놓은 납골당 같다.

나는 도시의 수많은 고층건물들 앞에서 가끔씩 조금은 엉뚱한 생각에 젖어들곤 한다. 우리의 콘크리트 건축물 수명이 기껏해야 이삼십년 정도라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세월이 흘러 다음 세대가 역사의 주인이 되었을 때, 저토록 많은 구조물들을 다 어찌할 것인가. 몽땅 부수어서 어디에다 내다버릴 것인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온다. 이것이 유독 나만의 기우(杞憂)일까.

수 년 전 터키에서 일어났던 지진 생각을 떠올릴 때면 나의 이 같은 염려가 얼마큼 현실로 다가선다. 그때 부수어졌던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 구조물들, 그 산더미 같았던 건물의 잔해를 치울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한 터키정부는 하는 수 없이 지중해에다 투기(投棄)해 버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지중해의 수면이 상승하고 수온이 높아져 엄청난 생태계 파괴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그나마 빙산의 일각이 아닌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수십 수백 년 전 조상들의 삶보다 지금 우리의 삶이 더 윤택하고, 그래서 더 행복하다고 누가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조상들은 대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

누각 하나 짓는 데도 자연에 대한 외경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자연과의 조화를 모색하려는 지혜로 나타났다. 지표면의 높낮이가 다를 때에는 네 기둥의 길이를 각기 다르게 하여 그 위에다 집을 올렸으니, 이를 일러 덤벙주초라 했다.

그뿐인가. 건축재료 하나하나를 자연에서 빌려와 소용 닿는 대로 사용하다 천수가 다하면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주었었다. 나무기둥이 그렇고 흙벽이 그렇고 오지기와가 그렇고 돌담이 또 그렇다. 말하자면 순환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어, 없던 것이 새로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있던 것이 사라진 경우도 없었다. 이를 좀 고상한 말로 하자면 엔트로피의 수치를 거의 증가시키지 아니하는 그런 삶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추한 모습 남기지 말아야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건축물들은 어떠한가. 온갖 크고 작은 내장재들이 모조리 화학제품 일색이고, 기둥이며 지붕이며 방바닥…, 어느 하나 시멘트가 재료로 쓰이지 아니한 것이 없을 정도다. 그야말로 시멘트로 짜 맞춘 거대한 상자들인 셈이다. 석회석을 원료로 하여 가공한 시멘트는 한 번 사용되면 다시는 원래의 석회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쓰이면 쓰인 만큼 바로 환경을 황폐화시킬 폐기물로 남고 만다.

이건 더 크게, 더 높게, 더 편리하게 살고 싶어 하는 데서 초래된, 현대인의 허망한 욕망의 껍데기다. 저 많은 욕망의 껍데기들을 장차 어찌해야 할 것인가. 절제하는 삶이어야 하겠다. 추한 흔적 남기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여기서 지금 이 순간에 생을 누리고 있다 해서 이것이 원래 우리의 것은 아닌 것을….

너나 나나 이렇게 잠시 머물다 이내 모든 것 놓아둔 채 어디론가 훌훌 떠나야 할 나그네들임에랴. 먼 훗날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야 할 우리의 아들딸들이 지금 우리가 살았던 삶을 두고 뭐라고 손가락질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정작 부끄러움에 앞서 죄책감이 깊어진다. 이 땅덩어리는 우리 당대에만 사용하고 말 그런 욕망의 충족처가 아니라 자자손손 대를 이어 생을 영위해 가야 할 절대의 자산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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