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强姦)의 역사'(당대 펴냄)는 책 제목부터 섬뜩하다. 에로틱한 분위기를 줄 듯한 느낌이지만 책을 들춰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사회풍속사의 명저로 꼽히는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미셀 푸코의'성의 역사'처럼 오히려 딱딱하고 진지한 톤으로 쓰여졌다. 책제목도 '강간'보다는 '성폭력'이란 용어가 적절한 것 같은데,출판사의 상업적 의도가 숨어있지 않나 싶다.
저자인 저명한 사회학자 조르쥬 비가렐로(파리5대학)교수는 "강간의 역사는 곧 근대적 주체의 탄생과정"이라정의하면서 "강간이란 비인간적 범죄를 단죄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고통, 정신적 황폐와 고문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비가렐로 교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부천서 성고문사건, 우조교 성추행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공권력과 남성의 지배적 관계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주는 바탕이 됐음을 알고 있다.비가렐로교수는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들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법 적용과 사회의 인식,피해자 보호 등에 대한 변화상을 분석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처럼 예전 프랑스에서도 힘있는 귀족들은 파렴치한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고 교묘히빠져나갔다는 점이다. 18세기 중반 '강간 기계'로 불렸던 프롱삭 공작은 수많은 처녀를 강제로 범했고, 말썽이 생기면손해배상을 통한 합의로 마무리했다.
폴렝 드 바랄 백작의 경우에도 "그가 몸종들을 피투성이로 만들어놓으면 그의 아내가나서서 돈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고 당시 신문들이 전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요즘과 크게 달라진게 없는 것 같다.
현재에는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예전에는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동의 여부가 유무죄의 판단근거였다. 19세기까지 프랑스법정에서는 남자 혼자로는 혼신을 다해 저항하는 여자를 성폭행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웃에 도움을요청하지 않거나 소리를 크게 지르지 않은 여성에 대해서는 '간통한 사례'로 보았고, 가해자는 무죄로 석방되기 일쑤였다.18세기 여러 판례에서 자주 인용된 일화.
"한 판사가 강간죄로 법정에 선 남자에게 가방에 돈을 가득 채워 고소인에게 배상금으로 주라고 명한다. 판사는 남자에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여자에게 돈가방을 빼앗아보라고 했다. 남자의 공격에여자는 돈가방을 움켜진채 전력을 다해 방어하고 몸부림쳤다. 결국 여자는 돈가방을 지켜냈다.
판사는 결국 여자가 원하기만했다면 자신의 몸을 돈가방보다 더 잘 지켜낼 수 있으므로 강간당했다는 여자의 주장은 거짓이다"고 판결했다. 그당시 여성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보지 않은 남성중심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일화가 아니겠는가.
가장 비인간적으로 다뤄진 것은 성폭력에 희생당한 아이들이었다. 동의의 몸짓이 뚜렷했다는 턱도 없는 논리로 10살도 채 되지않은 아이들이 가해자와 함께 쌍벌죄를 받았던게 보통이었다. "피해자도 뭔가 원인제공을 했을거야"라는 말투로 가해자, 피해자를 가리지 않는 구태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세기 들어 페미니즘의 대두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법 적용이 크게 개선되고 인권을 보호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보스니아 내전에서 자행된 조직적 성폭력, 교도소에서 죄수들간의 성폭력 등에서 보듯 아직까지 소홀하게취급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비가렐로 교수는 책끝 부분에 일본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맹렬하게 비판했다. "일본정부가 2차 세계대전 동안 한국여성들을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징집해 제국병사들의 '위안부'로 삼은 사실을 그나마 오늘날에 털어놓고 '마지못해'사과를 한 것은 시대와 문화가 변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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