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의 양민학살 문제가 최근 몇년간 다시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노근리 사건이 1999년 10월 AP통신에 의해 보도된 것이 기폭제가 됐고, 그 뒤 매일신문에 의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이 보도됐는가 하면 최근엔 영국 BBC방송이 포항 사건 등을 집중조명 했으며 예천 학살 관련 서류 발견이 뒤를 이었다.
◇어떻게 대처돼 왔나?=양민학살 진상 규명 요구는 4·19혁명 뒤 반짝했던 자유·민주의 바람을 타고 전국 곳곳에서 들불같이 일었었다. 이에 1960년 당시 국회는 조사단을 구성, 전국에 걸쳐 학살 사건을 신고받고 조사를 벌였다. 이때 경북지역 조사는 민주당 주병환, 자유당 윤용구 의원이 맡아 10일 동안 대구 가창, 문경 북삼면 석봉리, 대구형무소 등에서 진행했다.
1960년 당시 매일신문은 '검은 베일 걷은 가창학살 전모'(6월3일자) '문경 양민학살 드디어 백일화'(6월4일자) '행방 모를 1천400명'(6월6일자) 등 제목으로 조사 성과를 보도했다.
이어 6월7일에는 한국전쟁 직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1천402명의 명단까지 공개되고 대구지검에는 공비토벌 중대장과 경찰 등을 살인방화 혐의로 고발하는 고발장까지 접수됐다. 국회는 당시 조사 활동 결과와 접수된 피해 내용을 기반으로 전국의 양민 피살자 명부까지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진상 규명 활동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 앉고 말았다.양민학살 문제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 바람이 불던 1980년대 후반.
국내 대표적인 양민 피살지였던 거창 신원면 주민들은 1988년 2월 희생자 위령 궐기대회를 갖고 진상조사를 요구했고, 1990년대 들면서 경남 산청·함양, 문경 산북면, 전남 함평 등 곳곳에서 유족회가 결성됐다.
1996년 1월에는 국회가 법률 제5148호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양민 피살사건 중 첫 특별법이 만들어지는 성과가 거둬졌다.
◇얼마나 희생됐나?=1960년 10월 발족된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 노현섭 회장이 당시 국무원에 보낸 공문에 따르면 가족이 학살됐다고 유족회에 신고한 인원은 남한에서만 113만명에 이르렀다.
지역별로는 경남이 25만명으로 가장 많고 경북 21만명, 전남 21만명, 전북 19만명 등 영호남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제주 8만명, 경기 6만명, 충북 5만명, 충남 3만명, 강원 3만명, 서울 2만명 등이었다. 그러나 노 회장은 5·16 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제4대 국회가 펴낸 양민피살자 신고서 중 경산·청도 부분을 경산유족회 이태준 공동회장이 입수해 근래 공개한 자료에는 경산 356명, 청도 400여명 등이 피살된 것으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1960년 5월31일~6월10일 사이 경남북 및 전남·제주에서 국회 특위 위원들이 조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보고서는 24권 7천여쪽 분량이다.
그러나 작년 6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국제 민간법정 '코리아 국제전범 재판'에서는 수석검사로 나선 램지 클라크 전 미국 법무장관이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남한 60여곳, 북한 100여곳에서 300만명이 넘는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밝혔다. 국군에 의한 피살을 제외하고 미군에 의한 것만도 그 정도나 된다는 것.
◇경북도내 최근 조사=경북도의회는 1999년 11월 양민특위를 구성해 2000년 1월17일~3월31일 사이 73일 동안 주민신고를 받았다.
이때 접수된 학살 사건은 경북도내만도 총 119건. 그 중 10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해 집단학살이나 무차별 폭격으로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는 40여건이었다. 도의회는 이들 사건 중 21건에 대해 유족 및 관련 인사 면담, 현장 조사 등을 벌여 2000년 6월 500여쪽에 이르는 활동보고서를 펴냈다.
119건을 학살 주체별로 보면, 78건은 국군·경찰에 의한 것으로 신고됐으나 미군 폭격 학살도 33건이나 됐고 미군 함포사격에 의한 것이 3건, 미군 지상군에 의한 것이 3건 등으로 나타나 미군 범죄가 총 39건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기타 2건). 포항·예천 사건 등도 물론 이에 포함돼 있다.
지역별로는 군위를 제외한 도내 22개 시군 전체에서 학살 사건이 접수됐다. 포항이 14건으로 가장 많았고 경산 13, 청송 11, 칠곡 10, 울진 7, 경주·영천·청도 각 6, 안동·영양·영덕 각 5, 의성·고령·봉화 각 4, 김천·구미·영주·상주·예천 각 3, 문경 2, 성주·울릉 각 1건이었다.
당시 전문위원으로 특위 활동에 참여했던 권오영 경북도청 행정심판 담당은 "신고는 119건 외에도 상당수 있었으나 당시 국군에 의한 학살 일부, 보도연맹사건으로 불리는 좌익검거 사건, 전쟁이나 교전상황 중 실종 사건 등은 일부 제외해 실제 피해는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대책=피해 주장은 많아도 이를 밝히려는 정부의 의지가 부족하거나 남은 물증이 불충실하면 특별법 제정 등 진상 규명 및 보상 절차가 이뤄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마침 미국의 당시 문건들이 비밀 해제기에 접어 들어 속속 공개되고 있는 만큼 특히 미군에 의한 피해 규명은 정부와 관련 단체의 노력에 따라 성과를 거둘 수도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최근 들어 양민 학살이 속속 다시 이슈로 부활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정지화기자 jjhw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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