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사라지면 이내 지겨움이 엄습해온다. 하릴없이 시간을 죽여야하는 그 지겨움을 견뎌내기란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올 한해 우리 국민은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지루함을 이겨내야 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한다. 특별한 '발상의 전환'이 기대되지 않는 상황이라 일단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기를 기다리는 승객처럼 무작정 참고 기다려야한다.
걸핏하면 항로를 이탈하고 게다가 온갖 시험 비행까지 일삼는 바람에 승객은 초주검이 되었지만 자기가 선택한 길이라 어쩔 수없이 스스로 울분을 삭여왔는데 그래도 아직 내려야할 활주로는 멀기만 하다. 이제부터는 면벽(面壁)의 자세로 호흡을 가다듬고 마무리 항해를 조용히 지켜보는 초인력을 발휘해야 한다.
참으로 험난한 비행이었다. 이륙할 때만 해도 새벽 안개 따위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행기가 좀처럼 제 고도를 잡지못하고 동체의 흔들림이 계속되자 승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런 싸구려 항공기를 이용하는데 너무 비싼 항공료를 지불했다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불안과 후회가 뒤섞이는 순간, 승객들 사이에서는 서로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장은 수시로 승무원을 바꿔가며 질서를 잡으려고 노력했으나 승무원은 돈 있고 권력있는 승객과 이미 결탁이 돼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힘과 돈이 최고였다. 이것도 저것도 없는 승객들은 끼리끼리 모여 목소리를 높여대면 어지간한 요구는 죄다 들어준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됐다.
3등석 뒤칸에서 효도 관광길에 오른 노부부는 이런 한심한 작태에 역겨움을 느끼고 당장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회한을 억누르며 안전 착륙을 기다리기로 했다. 문득 농단(壟斷)과 동시(東施) 두 단어가 떠올랐다.
전국시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제국을 순방 중이던 맹자는 제나라에서도 수년간 머물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귀국을 서둘렀다. 왕은 맹자에게 높은 봉록을 줄 테니 떠나지 말라고 제의했으나 맹자는 재물에 달라붙어 '농단'할 생각이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농단은 '깎아 세우듯 높이 솟은 언덕'이란 뜻인데 장사꾼이 언덕에 올라가 시장의 상황을 쉽게 파악한 뒤 서민들의 이익은 아랑곳않고 장사함으로써 혼자 득을 보는 비열한 수법을 말한다.
막스 베버는 두 가지 형태의 자본주의가 있다고 했다. 근대적 자본주의와 전(前)근대적 자본주의가 그것인데 전근대적 자본주의는 오히려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보았다. 전근대적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천민 자본주의'와 '권력 자본주의'로 요약되는데 한국은 불행하게도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혼합돼있는 나라가 아닌가. 맹자식으로 해석하면 바로 '농단 자본주의'가 된다.
병자호란때 오랑캐의 치욕을 도저히 참지 못해 10년간 낙향한 우암 송시열의 지조나 구한말 일본에 항거하다 체포돼 대마도에 유배됐지만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며 단식으로 숨을 거둔 면암 최익현의 기개를 한국인의 자랑으로 여겨온 노부부는 비행기 안에서 진동하는 권력과 돈 냄새에 코를 막아야했다.
중국 고대 미인 가운데 월나라 서시(西施)의 얘기는 압권이다.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복수하기 위해 바친 미인으로 자신의 미색을 이용, '회계의 치욕'을 앙갚음 한 애국자였다.
그런데 그녀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늘 눈살을 찌푸렸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을 여자들이 자기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서시의 흉내를 냈다.
마침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동시(東施)라는 여인이 그 광경을 보고는 자기도 그대로 따라 했는데 동네 사람들은 이를 차마 보지 못해 며칠간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지금 이 땅에도 '한 마리 연어'에서부터 '애국가 4절'을 외치는 사이비 지사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동시'들의 잔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루하지만 비행기는 곧 착륙할 것이다. 트랩을 내리기 바쁘게 곳곳에 솟아있는 '농단'부터 허물어야한다. 서시와 동시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판단의 어리석음에 채찍질도 가해야한다. 다음 비행기는 제발 편히 앉아 갈수 있도록….
(윤주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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