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남편은 퇴근 후 곧장 집으로 돌아옵니까?" 아내들은 가끔씩 내 남편이 어디쯤 걷고 있는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봄마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고 국민가요 '잘살아 보세'를 귀가 따갑게 들어야 했던 시절, 남편들은 퇴근 후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인생의 목표는 중산층 진입이었고 내 집 마련이었다. 얇은 월급봉투를 쥐고 옷깃을 세운 채 종종걸음치던 남편들의 가장 큰 재산은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이었다. 그때까지 많은 남편들에게 인생의 목표는 제 가정 지키기였고 직장은 자아실현의 장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직장은 언제 쫓겨날는지 모를 살얼음판으로 변해버렸다. 게다가 집이 육신과 영혼을 누일 신성한 도피처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 시작한 남편들도 많다.
많은 40대, 50대 남편들에게 가정은 지친 심신의 휴식처가 아니다. 날이 갈수록 예리해지는 아내의 바가지, 아이들이 커 갈수록 무거워지는 책임감 때문이다. 심한 경우 집은 내일의 노동력을 짜내기 위한 배터리 충전소 같은 느낌마저 든다.
퇴근 후 이미 2차까지 술자리를 마친 남편들이 집으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3차, 4차를 외치며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은 어제오늘의 밤거리 풍경이 아니다.
대구시 수성구에 산다는 한 만취한 취객은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는 어쩌면 새벽까지 술자리를 찾아 헤매게 될는지도 모른다. 퇴근한 직장인이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멀쩡한 얼굴로 출근한 남편이 회사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미래를 암시한다.
"편해요. 이제 와서 돌아갈 집도 없지만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요. 남들이 어떻게 살든 나하고는 상관없어요. 나는 이렇게 사는 게 편해요." 대구역 뒤편 꽃시장 인근 쪽방에서 만난 반백의 40대 남자는 아내와 가족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충청도가 고향이라는 그는 5년 전 가출을 감행, 전국을 떠돌다 2년 전 대구로 왔다.
"한번쯤 가출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뻔한 생활, 희망이 없지 않소?" 가출하고 싶은 이유를 묻자 한씨라고 자신을 소개한 50대 남자는 그렇게 대답했다. 가출은 더 이상 청소년들만의 저항시위가 아니다.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박인홍의 '명왕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박범신의 '침묵의 집'은 익숙한 일상을 떠나는 남자,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남편, 회사로 출근하지 않는 아버지를 다룬다. 남편 혹은 아버지인 주인공들은 집과 회사는 자신의 뼛속까지 발라내는 예리한 연장일 뿐이라며 스스로 실종을 택한다.
소설이 강한 개연성에 바탕을 둔다는 점, 위의 소설들이 꽤 많은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시대 아버지와 남편들이 어디쯤 와 있나를 알려주는 좋은 방증이다.원룸 아파트, 자식 없는 부부, 독신자, 이혼이 늘어나는 요즘이다. 아내들은 한번쯤 내 남편이 어디쯤 와 있나를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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